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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May 14. 2024

햇살방

첫 원룸 이사

6월의 어느 뜨거운 날이었다. 관상은 과학이라 믿는 엄마는 집 구하는 어플 프로필 사진에 당당하게 증명사진을 올린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더니 “여기다” 했다. 그럼 뭐 그냥 가는 거지. 또 역시 아주머니는 야무졌다.


처음 부동산 문을 열었던 그 순간은 마치 고등학교 때 엄마 손을 붙잡고 핸드폰을 사러 대리점 문을 열던 기분이랑 비슷했다. 이상하게 엄마카드, 엄마찬스는 언제나 든든하다. 그 어떤 얍삽하고 나쁜 놈들에게도 절대 속지 않으면서 용맹하고 지혜롭게 지상 최고의 핸드폰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뭐든 처음을 함께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었다.


인생 첫 번째 자취방은 관상 프리패스 아주머니와 하루 만에 계약을 결심한 햇살방이었다. 6평대의 작은 원룸이었지만 큰 창문으로 채광이 좋았기 때문에 이름 붙였다. 답답하기 쉬운 작은 원룸에 해가 잘 드는 건 집을 고를 때 직장과 가까운 위치 외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건 중 하나였다.


아이보리빛 벽지에는 기다란 전신 거울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여자 세입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집주인 분께서 직접 구매해 준 작은 배려였다. 28년간 부모님과 함께 산 집에서 작은 용달차 하나로 낯선 동네로 와, 낯선 이가 걸어둔 거울 하나 덩그러니 있는 방 한 칸에 익숙한 물건들을 하나 둘 내려놨다.


이사 내내 곁을 지켜준 엄마도, 늦은 밤 애정 가득 담긴 장문의 카톡을 보낸 아빠도, 여동생 독립한다고 집으로 밥솥을 보내준 오빠도 그리고 앞으로 진짜 혼자 지내게 될 인생 28년 차 세입자도 그 작은 원룸에 모두가 함께 들어차 있는 기분이었다.


이사라는 게 그간 쌓아온 한 사람의 역사를 새로운 공간으로 하루 만에 폭주하듯 끌고 오는 것 같았다. 뭐든지 서둘러서 하는 일이 버거운 나에겐 재빠르고 능숙한 용달차 아저씨의 손놀림마저 지난 추억을 마무리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는 항상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적당한 미련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유 없는 변화는 언제나 낯설지만

인간은 또 무섭게도 곧잘 적응해 나간다.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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