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브림 May 15. 2024

방탕소녀

28년 만의 독립 어디 한 번

‘28년 만의 독립 어디 한 번 방탕하게 놀아보자’


했던 생각은 딱 며칠 정도였던 것 같다. (사실 놀 힘이 없음) 자취 n주차 현실은 주말마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장보고 밥 하는 남편 없는 현모양처가 따로 없다. 그러면 또 힘들어서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날도 허다했다.


사실 아무도 차려주지 않는 밥상을 홀로 차려 먹는 일도, 의자 하나 이불 하나 적당한 걸 고르는 일도, 모든 문제를 혼자 처리하는 것도 낯설고 어려웠다. 그 외로운 선택과 책임의 시간들은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느꼈던 안정감은 빼앗았지만 상당히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것들이었다.


열심히 놀아 재껴 보는 대신 나는 그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일들을 엄마가 해줬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휴일에 집을 돌보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 어머니들의 샤워에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예전엔 변기도 싱크대도 세면대도 화장실 타일도 뭐 원래 물을 쓰는 곳이니 원래 깨끗한 줄 알았지. 독립 후엔 그 원래 깨끗한 줄 알았던 것들이 원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엄마의 긴 샤워 시간만큼 똑똑히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혼자 살면서 휴식한다는 것은

쉴 공간을 정돈하는 것에 쉬는 것까지 합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세상엔 공짜도 없고 원래 그런 것도 없다.


일주일간 묵혀둔 퀴퀴한 빨래는 금요일 저녁이나 늦어도 토요일엔 해줘야 제대로 말려서 다음 월요일에 입을 수 있었다. 밝은 타일의 화장실 바닥은 물 때가 끼는 것이 너무나 잘 보여서 주말에 샤워를 하면서 대충이라도 닦아냈다. 한 여름엔 매주 펄펄 끓는 물과 베이킹소다를 하수구에 뿌려대야 악취나 벌레를 줄일 수 있었다.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먼지가 쌓이는 마법 같은 마룻바닥은 뜨거운 물로 짜낸 스탠드형 밀대로 열심히 밀어야 마음이 노였다. 안을 볼 수 없어 답답한 세탁기는 그래도 3-4개월에 한 번씩은 세탁조 클리너로 청소해 준다. (단 깨끗해졌는지 알 길은 없다) 건강을 위해 사둔 채소들은 하루 몰아서 손질해야 음식물 쓰레기를 한 번에 버릴 수 있었다. 대한 서울 독립 만세를 외치기 위해서는 똑똑하고 참으로. 몹시. 부지런해야 했다.


방탕하고 싶었던 소녀는

접을 일도 없는 방탕한 생활을 접고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이전 03화 햇살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