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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May 29. 2024

가습기가 고장 났다

자취생 고모의 서비스센터 방문기    

엄마가 선물해 준 가습기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사용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고장이라니. 대기업 제품이 고장이라니! 배신감을 조금 느꼈지만 다행히 집 근처에 서비스센터가 있어서 방문 수리 접수를 할 수 있었다.


조카가 서랍장에 눈가를 찍혀 성형외과를 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서랍장에 얼굴이 찍히냐는 말에 이미 인생을 초월한 꼬마 연년생 아(들) 둘 아빠인 오빠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끝내 "이래서 집안에 의사가 있어야 해" 했다.


토종 문과인 오빠는 아들 둘에게 항상 NASA 동영상에서 본 로켓 발사 장면을 온몸으로 재현해 선사하거나 어려운 의학 용어, 과학 용어를 주입하며 지능적으로 놀아줬다. 악동들에게 안 다치는 법을 가르칠 방법은 없었고 곧 죽어도 문과는 안 됐다. 그의 나름 거시적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또 이마를 찢겨 얼굴 구석구석을 돌아가며 병원행을 반복했다.


뜻대로 되는 건 그다지 없었다


무릎 높이도 안 되는 가습기를 간신히 가방에 넣었다.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타고 세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짊어지고 갔다가 돌아오는 일련의 방문 행차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좀 건조하게 살아볼까 합리적 합의도 시도해 봤지만 그렇지 못한 이성적인 몸뚱이는 어느새 터덜터덜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젠간 내 차에 대형 가습기를 넣고, 수리비용 걱정 없이, 서비스센터에 성큼 찾아갈 때가 오겠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그곳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애물단지처럼 뽁뽁이에 둘둘 말아 모셔온 가습기를 가방에서 꺼내 잠시 이별을 고했다. 눈가를 꿰매러 수술실로 들어가던 꼬맹이를 오빠는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을까.


지금도 로켓 시뮬레이션 중일 그가 조금 애잔하다.


다음 날 바로 수리 됐다는 연락을 받고 서비스센터를 찾아갔다. 고장도 수리도 빠른 대기업이었다. 기사님은 멀쩡하게 고쳐둔 가습기를 내가 정성스레 포장해 온 원래 그 모습 그대로 포장해서 돌려주셨다. 왜 망가진 거냐고 묻자 알아듣기 어렵게 대답하셨고 감사합니다로 마무리했다. 오빠 역시 핏줄의 약하디 약한 피부결을 책임져준 의사 선생님께 이런 감사를 표했겠지.


“(다시 안 오겠다 약속은 못 드리겠지만 어쨌든 또)

감사합니다. “


데스크에 수리 비용을 묻자 “무료 서비스 기간”이라면서 공짜라고 하셨다. 무료라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은 단어였던가. 조금 더 늑장을 부리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그간 살집 꼬매기 기술에 200만 원가량을 지불해 온 오빠에 비하면 분명한 선방이었다.


그 어떤 이과 유도성 주입식 교육도 없이, 무려 공짜 치료를 받은 가습기는 이제 제법 늠름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본인의 할 일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봤다.  


NASA는 바라지도 않을게 다치지만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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