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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May 30. 2024

도어록의 반란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도착한 현관문 도어록 화면에 손을 올렸다. 손 끝만 스쳐도 번호가 떠야 하는 도어록이 어쩐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손바닥을 비벼 대도 번호가 뜨지 않았다. 응? 이번엔 또 너야?


이 원룸 생태계는 정녕 나를

맘 편히 가만 놔두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그날 나는 평생 자세히 볼 일 없었던 도어록 번호판 밑에 콩알보다도 작을 글씨로 쓰인 회사 이름과 상담전화번호를 발견했다. 사람은 다 방법을 만들어 놓는구나. 게임 퀘스트의 시작이 섬뜩하게 순조롭다.


전화번호 옆에 쓰인 24시간이라는 글자에 “그렇지, 문은 우리가 24시간 써야 하니까” 하며 꾀나 논리적인 서비스 존재 이유를 떠올리며 안심하고 전화를 걸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상담원은


"계속 손을 대도 번호가 안 뜬다는 거죠?" 했다.

하루에도 이런 사람 100명쯤은 대하는 듯했다.


"그럼 일단 근처 편의점에서 9 볼트짜리 네모난 건전지를 하나 사 오시고요 (예?) 도어록 은색 볼록 튀어나온 전자에 건전지를 대고 다시 번호판에 손을 대보세요. (예?) 그래도 안 되면 다시 전화 주세요. (예...)" 했다.


개그계의 철 지난 유행어 “많이 당황하셨죠? “ 식의 학습형 공감도 없이 그녀의 상담은 마치 속사포 랩처럼 들입다 해결 방법만 읊조리는 자기중심적 토크에 가까웠다. 구강의 움직임도 볼 수 없는 비대면 래퍼의 가사를 단박에 알아듣기엔 9 볼트짜리 건전지부터 막힌다.


일단 9볼트를 메모장에 적고 달려 나갔다. 눈이 많이 왔던 길가는 자동차의 흔적으로 흙탕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오늘 집에 들어갈 수 있겠지?


편의점에 가는 험난한 길에서 속으로 이게 맞아? 건전지를 대면 번호가 뜬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믿을만한 사람은 이 얼굴도 모를 익명의 무덤덤녀였다.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건전지 하나가 6천 원이 넘었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었다. 통통하고 비싼 건전지를 사서 다시 현관문 앞으로 갔다. 상담원이 말한 대로 건전지를 도어록 번호판 아래 불뚝 튀어나온 은색 전자 근처에 각종 방향으로 수없이 대 봤지만 애석하게도 번호는 뜨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상담원은


"그럼 교체를 해야 합니다.

교체 비용 18만 원인데 접수해 드릴까요?" 했다.


눈길에 달려 나간 가련한 회원의 노력은 그대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 네모난 판때기에 겨우 숫자 몇 개가 뜨질 않아 18만 원을 주고 교체를 해야 한다니. 내 집 출입기능을 상실한 얄미운 문고리 앞에서 나약한 인간은 어쩔 도리가 없다.


"네 접수해 주세요."


그녀의 무덤함에 무덤함으로 승부해 봤지만 그렇지 못한 손가락은 집주인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거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이사를 하고 처음으로 집주인한테 전화를 했다.


"어이쿠, 눈도 오고 추운데

얼른 신청하고 계좌번호 알려줘요."


무덤덤녀와의 사투 끝에 맞이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다정함에 잠시 추위를 잊는다.  


참 쉬운 인간,

이렇게 또 레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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