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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Jun 03. 2024

원룸에서 카레 끓이기

위잉치키

어제 널었던 빨래가 아직 안 말랐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하필 엄마가 싸준 채소들과 일본 고형 카레가 눈에 띈다. 역시 채소 처리엔 카레만 한 게 없지 하면서도 이 냄새를 어쩌나 하는 생각이 서로 싸운다.


원룸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7번 방 화장실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별로 안 궁금한 옆집 저녁 메뉴까지 알 수 있다. 언제는 라면이고 언제는 김치찌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향으로 알아챌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매운 걸 좋아하나.   


언제 누구에게 돌아갈지 모를 끝없는 밥 냄새 눈치게임에서 그것도 빨래를 널어둔 채로, 원룸에서 카레를 끓이는 건 아주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잘못했다간 강력한 냄새 때문에 빨래를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익명의 옆집 누군가는 “오늘은 또 카레군” 할 수도 있겠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카레는 걸쭉한 제형만큼 그 향도 묵직하다. 오늘도 자취생은 수동적 부지런함을 작동한다. (위잉치키)


민망하게도 부엌에서 몇 발작 걸으면 자칭 드레스(룸 말고) 존이 있다. 널어둔 빨래를 행거에 대충 걸어둔다. 행거 앞에 커튼이 있는 건 이런 면에서 참 좋다. 커튼을 단단히 치고 창문은 활짝 열어둔다.


평소 같으면 야채를 달달 볶다가 물을 붓고 카레를 끓이지만 오늘은 그냥 끓는 물에 비슷한 크기로 썰어둔 감자, 양파, 당근을 그대로 털어 넣는다. 볶는 연기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단단하면서도 잘 쪼개어지는 카레 덩어리를 넣고 몇 번 휘휘 저어준다. 마지막 치트키, 소고기 다짐육 투하. 그래도 단백질은 중요하니까. 양보는 없다. 후추까지 톡톡 뿌려주면 잡내 없는 카레 완성.


카레가 완성되면 여지없이 유리그릇 락앤락을 몇 개 준비한다. 익숙한 듯 뚜껑을 똑딱똑딱 연다. 한 솥 푹 끓인 카레는 혼자서 하루 세끼를 먹어도 다 못 먹기 때문에 이렇게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좋다. <자취백과>


요리 하나로 그 어렵다는 여러 날의 끼니 만들기에 성공, 뿌듯함+1을 획득한 자취생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묵직한 카레 냄새를 킁킁 맡는다. 거저 되는 건 없다.

환기 풀가동 (위잉치키)


언젠가 카레를 끓이기 위해 냄새 걱정 대비책을 줄여볼 날이 올까. 내 집은 언제쯤, 넓은 베란다가 딸린 아파트는 언제쯤 나에게 와줄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카레의 향은 이길 수 없을 거야.


오늘도 자기 합리화로 정신 승리를 한다.

(카레 오이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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