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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Jun 05. 2024

배수구 트랩의 진실

포기를 모르는 자취 피닉스

처음 7번 방을 둘러보러 갔던 날이었지. 어쩐지 세입자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그 많은 향초에 불까지 켜 놨더라. 이것이 집을 보러 온 건지 프러포즈를 받으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였어. 그렇게 말끔히 정돈된 집에서 내적 그루브를 타며 플로럴 향기에 취해 내가 참 멋진 원룸을 발견했군! 하며 뿌듯해했어. 방의 구조도 내가 찾던 딱 그런 공간이었거든. 계약? 안 할 이유가 없었지. 그런데 말이야...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결말은 안타깝게도 해피앤딩은 아니었다. 그가 향초에 불을 켜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방이 좀 시원한 편이었던 7번 방에서의 여름은 그 시작이 아주 나이스 했다. 에어컨을 그렇게 많이 틀지 않아도 견딜만했으니까. 그런데 한 달, 두 달 지내다 보니 싱크대 아래 하부장을 열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게 느껴졌다.


문득 향초남이 남기고 간 ‘배수구 트랩’이 생각났다. 집주인이 쓰라고 줬다는데 어디서 쓰는 물건 인지도 몰랐고, 사이즈도 안 맞았고, 딱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악취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 요상한 물건을 검색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수구 트랩의 목적은 다름 아닌

악취 완벽 차단이었다.


하? 이제야 모든 비밀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향초로 증거 인멸을 시도, 여기 배수구엔 택도 없는 사이즈의 세상 무책임한 안심 장치를 건네며 원하는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어느 불쌍한 자취생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자취생 특 : 그럼에도 언제나 그랬듯

어쩌면 내가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응 제발 멈춰)


온갖 소다 패밀리를 모조리 사 모아 매주 주말 싱크대 청소를 했다. 물 만난 싱크대는 덕분에 번쩍번쩍 윤이 났지만 역한 냄새는 여전했다.


날은 갈 수록 더워졌고 냄새는 멈추지 않았다. 햇살방에서 마주하고 기겁을 했던 역마살 다분한 동거생명체

Baqui까지 마주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겉으로 멀끔해 보이던 집은 금방 B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배움엔 끝이 없다.


유튜브에 ‘배수구 청소’를 검색했다. 이것만 넣으세요 하는 요리사의 영상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적은 도구로 완벽하게 악취를 없앨 수 있는 신뢰 가능한 정보였다. 구세주 같았던 싱크대 청소 전문 셰프님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뜨거운 물을 붓고, 과탄산 소다를 넣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비닐로 싱크대 배수구를 덮어두세요.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고 충분히 환기를 시키세요.”


너무 무서웠다.

뭔가... 엄청난 게 올라올 것만 같았다.


30분 뒤 비닐을 열자 배수구 안쪽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온갖 찌든 때와 발암물질 급 연기를 몰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역한 거품은 과학실험처럼 수직으로 몇 센티 지익 올라왔다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베이킹 소다를 털어 넣어 이 악취와의 전쟁을 완전히 끝내려던 차, 그만 소다의 양 조절 실패로 그대로 배수구가 막혀버리는 2차 대참사가 벌어졌다.


잘 뚫린 구멍을 소다로 다시 막는 기술.

가지가지다


이번엔 ‘배수구 뚫는 법’을 검색한다. 이러다 배관공이 되는 건 아닐지. 대체 유튜브 없이 어떻게 살았던 거야. 이번엔 뜨거운 물을 붓고 화장실 뚫어뻥으로 해보라는 설명대로 의자 위에 서서 최대한의 압력으로 눌러봤다.


잠시 후


싱크대 왼쪽 벽면에 난 작은 구멍들로 알 수 없는 검은 찌꺼기가 섞인 구정물이 용암처럼 쏟아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욕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고자 마스크를 썼다.


내 손으로 저 싱크대 깊숙한 곳과

제집처럼 드나드는 뻔뻔한 B들

그리고 향초를 켜둔 그놈까지


모조리 처단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분노의 뚫어뻥질을 하고 그 오물 같은 물을 변기에 퍼다 나르기를 수 십 차례, 졸졸 흐르던 물이 드디어 시원하게 내려갔다. 딱딱하던 고무 배관은 말랑해졌고 냄새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도 자취생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미 몇 번의 전사 이력이 있었지만

이 번 난이도는 아주 최상이었다.


그날 이후 불굴의 자취 피닉스는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을 의심하는 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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