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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 Oct 26. 2024

시계의 회복력

시계, 특별한 시간을 사는 법

추석 연휴 시작 즈음부터 시계가 애를 먹이고 있다.


어릴 때부터 팔찌보다 좋아한 게 시계였다. 꼭 브랜드가 아니어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시계를, 내 나름의 사연을 가진 시계에 배터리와 시곗줄을 교체해 가며 차는 맛을 즐겼다. 학창 시절까지도 내 주변에 시계를 차는 친구도 많지 않았고 시계약을 갈거나 시곗줄을 바꾸는 친구는 더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생일 때 엄마 아빠가 금은방에서 사준 야광탁상시계는 지금까지 엄마 아빠에게 받은 최고의 선물로 기억한다. 


시계를 사면 꼭 특별한 시간을 사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야광 탁상시계가 고장났을 때, 엄마가 사준, 파란색 바늘이 너무 예뻤던 손목시계를 수능 목전에 떨어뜨려 시계에 다이얼이 떨어졌을 때 상실감은 어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눈 결막에 있는 모반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다. 학생 때부터 거의 15년 가까이 다니고 있는 안과에서 레이저 시술로 5~6년에 한 번씩 받는다. 이번에도 불 꺼진 시술실에서 레이저로 모반을 여러 번 태워내고, 안과에서 나오는 길, 비가 오기에 장우산을 펴려는데 왼쪽 손목에 찬 워치 디스플레이가 지직거리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나가버렸다.


무려 5년 전에 동생에게 선물 받은 갤럭시 워치가 이렇게 가버렸다. 갔어도 벌써 갔어도 이상할 것이 없이 오래, 막 쓰긴 했지만 침수가 되거나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꺼져버리는 게 뭔가 허무하고 아쉽고 찜찜했다. 최근에 더 오래 쓰려고 스트랩도 사고, 귀여운 충전독도 샀는데….


얘가… 레이저실에서 레이저를 맞았나…, 하는 과학적인 듯 비과학적인 추론을 해봤지만 이미 망가진 건 망가진 것. 


다음 시계를 고민해야 했다. 갤럭시 워치 최신 제품을 사느냐, 요즘 러너들이 쓰는 가민도 좋다던데, 가성비로 샤오미 밴드로 갈까, 그도 아니면 스텝 트래커 기능이 있는 전자 시계를 살까, 아예 아날로그 시계로 돌아가버릴까…. 추석 내내 이 제품을 담았다 저 제품을 담았다 결정을 하지 못했다.


연휴가 다 지나고, 일단은 얼마 전에 배터리를 갈아 살려둔 카시오 아날로그 시계를 차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출근을 다 해서야 깨달았다. 시계가 멈췄다는 걸…. 이것도 대체 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성이 있는 워치 충전독과 같이 둔 것이 문제인 것 같았다.


시계들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멈췄거나 말았거나 가방에 아무렇게나 두기는 싫어서 하루 종일 손목에 차고 다녔다. 그리고 퇴근 무렵 습관처럼 시계를 보다 헛웃음이 나왔다. 오전 8시쯤 멈췄던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의 회복력 같은 것인가. 별일이 다 있다 하고 다시 저녁 7시 6분으로 바늘을 맞췄다.


어떤 하루들은 자성을 세게 맞고 멈춰버린 시계처럼 짜증과 무력함과 억울함 같은 것들을 다루느라 진력을 빼기도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조금 더디더라도 어쨌든 가고 있었던 시계처럼 회복돼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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