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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 Oct 24. 2022

나 스스로 엄마가 되어주기.

나 스스로 엄마이자 어린아이가 되고 싶어졌다.

요가원에서 열심히 일하며 3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건널목 너머 서있는 임산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혼을 일찍 해서 남편과 아이를 돌보기 좋은 직업으로 요가를 택했는데 남자 친구도 자주 못 만나고 까칠한 나만 있었다. 꿈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요가강사도 내 꿈이었는데 진짜 꿈꾸던 일상은 아니었다. 임신이 하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변기 위에서 그냥 울었다.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요가는 분명 선하고 좋은 것일 텐데 어찌 우리 요가원은 매일 화내고 짜증내고 급을 나누고 분열될까. 거기에 강사이자 매니저인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제야 느껴졌다. 얼마 전 남자 친구랑 여행 갔던 태국에서의 수련이 생각났다. 분추 선생님은 늘 웃고 계셨고 수련할 때 숨 쉬라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내 몸을 믿고 내 의지를 믿어주시는 느낌이었다. 우리 요가원처럼 ‘이건 안돼 저건 안돼’라는 말이 별로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비행기를 끊어 태국으로 수련을 떠났다. 원장님은 그만두는 내게 그렇게 살지 말라 했다. 더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이 됐다. 내가 너무 불쌍해서. 하고 싶던 결혼 준비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파혼을 했다. 결혼식 하루 전날. 망할 결혼은 별 충돌도 없이 척척 진행되다 폭발하듯 끝나버렸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파혼 이후의 어마어마한 기쁨과 자유로움이 목적이라 파혼 얘기는 짧게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파혼에 위로가 되길 바란다. 아참, 파혼한 김에 가족들에게 완벽함을 보였던 장녀 은하는 사라졌다. 너무너무 편했다. 아주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그 후 나는 혼자 있고 싶었고, 마음이 소진되는 형식의 요가원에서 더 이상 무얼 배울 필요가 없다 생각해 고향 부산에서 서울로 떠났다. 요가원에서 일은 때깔은 좋지만 무서운 원장님과 깐깐한 회원님들 사이 총알받이 같던 일이라 사람이 싫어지기에 딱 좋은 서비스직이기도 했다. 특히 3년 차 초보강사 이자 매니저를 겸했던 나에게는.


파혼 후 안부를 묻는 사람들은 내 불행으로 삶의 안위를 되찾는 사람들 같았다. 파혼 후 연락 없이 기다려주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좋아진 얼굴을 보며 아무 질문 없이 함께 기뻐해 주었다. 서울에서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불안한 마음을 들고 분주히 수업을 다녔고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마다 수련을 했다. 땀을 내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점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나의 시선은 밖이 아닌 온통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의 힘도 생겨버렸다. 힘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닌데 힘이 생겨버렸다.


요가는 힌두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힌두에서는 하나의 신이 두 가지 모습으로 늘 변천한다. 동전의 양면을 설명하기 아주 적절한 예시들이 많다. 힌두교 3대 신 중 하나인 시바신은 춤을 추며 우주를 파괴하는 신이자, 창조의 신이다. 또 다른 하나인 비슈누는 평화를 위한 유지의 신이자,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다.  귀여운 원숭이 신인 하누만은 지혜의 신이자 바람의 신이 기도하다. 그중 나는 시바신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는 춤을 추며 우주를 파괴하고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한다.













수련 후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몸과 마음 사이로 여전히 남아있는 단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가 정말 추구하는 단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주로 생각하는 단어들은  ‘불안, 의심, 욕망, 질투, 이 모든 걸 상쇄할 깨끗함’이었다. 그 단어들을 집에 와 앉아 여러 책들을 읽으며 또 생각해보았다.


불안’은 동물들의 당연한 생존 기제였으며 불안하지

않은 것들은 죽었다’는 구절을 통해 나의 불안이 이혼 가정의 어린 내가 살기 위해 곰곰이 상황을 살피던 것으로부터 왔음을 알았다.


의심’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에 타인을 믿지 못한다’는 구절을 보고 나를 의심하는 것은 나의 작은 성취들을 온전히 느끼지 않고 다음 성취를 향해 나갔던 성급함 때문임을 알았다.


’ 욕망’은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라 자꾸 생각을 하다 보니 욕망을 외면한 사람이 어색하고 불만족한 삶을 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며 내 욕망을 끝까지 주시해보기로 했다.


깨끗함’은 ‘빈 공간, 청소’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다 ‘회피’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가를 통해서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할수록 무언가 분열된다고 느꼈는데, 요가를 통해서 나의 본성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싯다르타는, 자기가 바라문으로서, 참회자로서 이 자아와 투쟁을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 싸움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던가 하는 이유도 어렴풋이나마 예감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다 것이다. 자기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언제나 가장 현명한 자였고, 언제나 최고의 열성파였으며, 언제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으며, 언제나 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언제나 사제 아니면 현인이었다. 이런 사제 기질 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들어 와서는 거기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런 싯다르타는 죽고 없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이 새로운 싯다르다 역시 아마도 늙게 될 터이고, 이 새로운 싯다르타 역시 아마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싯다르타는 덧없는 존재이며, 형상을 지닌 것은 모조리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자기는 이 새로운 싯다르타는 젊고 기쁨에 가득 찬 어린아이 있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나는 깨끗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일단 다 들어보기로 했다. 파혼 후 어느 날 방 안에서 눈을 감고 호흡을 하는데 “나 스스로 엄마가 되어주어야 하구나, 그래서 이 갑작스러운 결혼과 파혼이 일어났구나, 어렸을 때의 감각을 찾아보자. 엄마이자 어린아이가 되어보자.”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었다. 결혼을 해서 요가를 그만두어야 나의 본성과 맞닿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것은 파혼으로 끝이 났지만 어쩌면 더 본성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몇 달에 지나 싯다르타 책을 읽고 더 확신이 들었다. 젊고 기쁨에 찬 싯다르타, 아니 은하가 되고 싶었다. 거기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많은 규제와 절제가 강요되지 않는 서핑을 더 하고 싶어졌다. 그럴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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