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인 상황. 추운데 춥지 않다. 문장 그대로는 이치에 맞지 않지만, 역으로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상황일 때, 역설적인 문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역설적인 순간을 종종 마주한다. 싫은데 좋은 것처럼 말이다. 간편해서 지우지 못하면서도 볼 때마다 반갑지는 않다. 배민이 그렇다.
백 가지가
넘는 음식 중에
고를 것이 없다
내게 일상이었다. 배달의 민족을 어플을 켜서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이렇게 메뉴가 많은데 정작 먹을 게 없다는 아이러니. 알면서도 다시 켜는 걸 보면 사람의 인지능력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끼에 평균 2~3만원 정도 되는 돈을 내면서, 배달비 몇 천원에 시키지말까 잠깐 망설이지만 오늘만 시키지 뭐 하며 결제한다. ‘다음엔 안 시켜먹으면 되지 뭐’ 하면서. ‘레시피 찾아서 집에서 요리해서 먹을꺼니까’ 하면서. 오늘만 편하게 먹자 오늘은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으니, 누려도 된다면서 늘 너그러운 나를 봤다. 전지적 시점으로는 나를 내려보며 ‘돈 내면서 칼로리만 얻겠네’ 라며 혀를 찬다.
돈 주고
불편을 사다니
결제하고 배민 ‘배달 현황’을 본다. 배달기사 분이 뜨겁게 혹은 차갑게 음식이 조리된 상태로 곧장 깔끔하게 오기를 수 분의 시간을 써가며 염려했다. 혹시나 음식이 오토바이 저장 박스 안에서 흔들려, 내 밀면이 갈비탕이 쏟기지 않을지, 혹시나 설빙 딸기 빙수나 배스킨 라빈스가 녹지 않을지 신경쓰인다. 편리함을 얻기 위해 돈을 썼는데,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는 찜찜한 기분은 편리함에 대한 대가인가.
깊은 맛은
불편함에서 온다
종갓집 김치를 사먹었다. 시댁과 친정이 있는 지역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음식을 쉽게 받지 못했다. 먼 거리에 받는 음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신다고 할 때마다 거절을 하는 습관이 들었다. 우리도 어르신들도 으레 음식을 안주고 안받는 데에 익숙해졌다. 십여년 동안 사먹는 종갓집 김치에 길들여졌다. 그러다 친정 엄마가 만든 김치를 맛봤다. 지리산에서 직접 키우신 배추로 집에서 양념을 해 만든 김치는 맛의 차원이 달랐다. 이것이 집김치로구나. 납작 엎드려 달라고 구걸하게 만드는 김치. 아무리 집으로 가는 길이 멀어도 아이스팩에 넣어서 들고 갈래요. 우리집에 들고온 소중한 김치를 정성 담아 썰어서, 조금씩 아껴 먹는 중이다. 어렵고 거추장스러워도 김장을 직접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너일 것이다가
너였다가
막상 니가 오면 서글퍼져
문 앞에 뒀다는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바닥에 놓여진 곱게 묶여진 비닐 봉지를 들고 왔다. ‘문 앞에 두고 벨 눌러 주세요’라는 멘트는 코로나가 남긴 위대한 시그널이다. 햄지 먹방의 그녀처럼 나도 이렇게 음식 가지러 나가는 동선을 촬영 한다면 어디다 카메라를 둬야 구도가 잡히는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그러나 봉지에서 음식을 꺼낼 때 ‘우와 맛있겠다’보다 이것 저것 뒤섞인 음식 냄새가 아주 고급지진 않은 때가 있다. 분식류를 여러 가지 시켰을 때 종종 그랬다. 또 프레쉬한 기분을 망치는 순간은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고요히 다가온다.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면서 내 음식에 가 닿았을 환경호르몬을 생각하는 찰나의 순간. 한 끼 배달에 이렇게 많은 플라스틱이 사용된다는 씁쓸함이 뭔가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를 가라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