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moni

우리말과 영어

by 우즈

영어가 싫었던 적이 없다.

우리말도 소리 내어 읽는 어감을 좋아하는데, 영어도 소리 내어 읽었을 때 특유의 리듬감이 재미있다. 발음은 콩글리쉬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읽고 소리 낸다는 행위를 즐겼다. 육아를 하면서 엄마인 '나'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끼며 힘들어할 때도, '엄마표 영어'라는 것을 알고, 영어책을 읽어 주는 것에, 매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오히려 느꼈던 사람이 바로 나다. 쉬운 유아용 영어 원서 책은 내게 숨 쉴 틈을 줬다. 작은 너에게 이 원서를 읽어 주기 위해 그토록 많은 영어 공부를 했었구나 싶어서, 전공과 달리 써먹지 못하는 영어에 보상이 제대로 되었다.


애국심이 들 때는 이럴 때다.

한국적인 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를 볼 때, 가슴이 웅장해진다. 문화관광공사에 만든 'Feel the Rhythm of Korea'라는 짧은 유튜브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한국의 문화를 한국인이 아닌 사람에게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서, 콘텐츠를 짜낸 그들의 진심이 느껴질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들에게 아무리 우리 것 좀 봐봐요. 하더라도 그들의 문화에 가 닿는 접점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커피잔을 마련하고 들이부어야 제대로 먹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주 우수한 콘텐츠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런 걸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토끼, 도깨비, 호랑이


위와 같은 단어를 영어로 적어 놓은 걸 보면 한글인데도 낯선 묘한 이미지가 연출된다. 어쩌면 영어로 표기되어 더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하는 작용이 세게 오는지도 모르겠다. 아이 원서를 자주 빌려서 보는데 외국인 작가가 쓴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이 책은 외국에 사는 한국인이 영어로 한국적인 소재를 써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었다.


남매인 누나와 동생이 학교를 마치고 할머니네 집으로 간다. 할머니도 영어를 잘한다. 아이들은 재미교포의 자식인지 한국어가 낯설고 영어를 잘한다. 어릴 때부터 띄엄띄엄 들은 한국어를 조금 아는 모양이다. 영어를 잘 구사하는 할머니지만, 집 안 곳곳에는 한국 문화 소품으로 인테리어를 했다. 우리 할머니가 쓰실 법한 이불과 베개가 있는 배경에서 영어를 아주 잘 하는 할머니라니. 이런 이질적인 컨셉부터가 마음에 훅 들어왔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알 만한 것이 눈에 계속 보인다. 방석, 항아리, 조선시대 책 같은 것, 민화 등이다.


할머니 방 벽에 알 수 없는 새로운 벽이 기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팥죽을 끓인 할머니에게 다가온 호랑이가 한 짓이다. 할머니가 사라져 없는 집에서 아이들이 방에 새로 생긴 이상한 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따라 들어간다. 토끼가 나와서 '아, 그 호랑이' 하면서, '그거 진짜 베리 커' 하는데, 한국말 사이에 영어를 어쭙잖게 섞어 쓰는 폼이 우습다. 아이들은 영어로 말을 하면서 계속 길을 따라가다가, 도깨비를 만나고 호랑이도 만난다. 풍성한 흰 꼬리를 가진 여우를 만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 여우가 할머니을 짐작하게 하는 방식이 기발했다. 대놓고 '이게 이거예요'라는 방식이 아닌, 은밀하게 숨겨진 힌트.


Julie Kim, Where's Halmoni

작가의 솜씨가 탐났다.

우리 문화를 재치있게 녹여낸 아이디어에 샘이 날 정도였다. 영어로 말하는 아이들에게서, 한글이 간혹 사용될 때 와닿는 느낌이 강렬해서 좋았다. 한국적인 것을 외국 문화와 섞었을 때 나오는 묘한 느낌이 있는데, 그럴 때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더 느껴진다. 마치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 '미나리' 같은 작품을 외국인이 외국에서 인터뷰할 때, 우리나라 감독이나 배우가 한국어를 쓰면, 뭔가 대화 상황이 이질적이면서도 그 사이 우리말의 웅장함을 느낄 때처럼 말이다.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 저 밑에는, 한국 문화를 영어로도 잘 표현해내고 싶은 원대한 욕망이 없지 않다. 결국 가 태어나고, 내가 살아온 곳을, 내가 겪어온 문화를 잘 드러낼 수 있어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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