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러 간 미국
구경만 해도 재미있던 할로윈 이벤트에 다른 사람과 같이 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갈 사람을 모집했다.
할로윈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는 호텔 방을 다 같이 꾸며보게 되었다. 몇 달 뒤에 한국에서 열리는 이벤트를 홍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기획할 때만 해도 가기로 한 인원은 4명이었는데 늦게나마 한 명이 더 추가되고 미국의 지인들이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행사를 소화할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의 트릭 올 트릿 룸(Trick or Treat Room) 콘셉트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결정했다.
홍보 아이템은 소맥과 달고나 게임으로, 한국에서부터 코스튬들과 달고나, 화려한 조명이 달린 소주잔들과 소맥 탕탕이를 준비했다. 어렴풋한 아이디어는 미리 정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정한 게 없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면서 어떻게 꾸밀지 상상했다.
지난번 이벤트 때 구경한 방들은 다들 호화로웠기에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엄청난 걸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과 비싼 미국 물가 사이에서 선택지가 얼마 없었다.
고민만 하다가 뭐라도 찾아보자며 나간 곳에서 넷플릭스 팝업스토어를 발견했다.
<오징어 게임> 콘셉트로, 가벽으로 만들어진 분홍색 벽과 청록색 계단이 교차하는 중간에 진행요원이 서있는 부스를 보고 유레카를 외쳤다.
방을 분홍색, 청록색 종이나 천으로 장식하면 그리 비싸지 않게 이 부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잡화점에서 분홍색 천과 청록색 테이블보를 발견했고, 구름을 만들 흰색 펠트지도 싸게 살 수 있었다. 이것들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진행하던 놀이터도 연상시킬 수 있을 듯싶었다.
콘셉트가 <오징어 게임>이라면 당연히 콘텐츠는 게임이다.
할 만한 콘텐츠는 딱지치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달고나 게임 정도면 될 것 같았다.
딱지는 신문지와 잡지를 접어서 준비했는데 딱지를 쳐서 뒤집는 게 너무 어려워서 방문 앞에서 몸풀기 게임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해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넘기냐고 하면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드물게 한 명이 딱지를 쳐서 넘길 때면 갑자기 호텔 방을 뒤흔드는 환호성이 들리기도 했다.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을 영어로 시청하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레드 라이트(Red light), 그린 라이트(Green light)라고 설명한다.
신호등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미국에도 비슷한 게임이 있었다. 덕분에 이미 규칙을 아는 사람들이 절반은 되었다.
적당히 주변 사람을 따라서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행하는 사람은 모두 핫핑크 색의 진행요원 슈트를 입었다.
‘무궁화 꽃’을 위해 영희 가면을 쓴 진행요원이 방 한가운데에 있었고, 나머지 진행요원은 동그라미 세모 엑스가 그려진 검은색 가면을 쓰고 주변에 서있었다.
나는 여러 테이블을 보조했는데 주로 ‘무궁화 꽃’의 진행을 도왔다.
‘무궁화 꽃’은 호텔방의 화장실 근처에 일자로 붙인 흰색 테이프가 출발선이었다. 영희가 레드 라이트와 그린 라이트를 크게 외치면 게임이 시작됐다. 영희에게 걸리지 않고 영희까지 달리면 됐는데 거리가 길지 않아 진행 시간이 가장 짧았다.
방 한구석에서는 ‘무궁화 꽃’을 통과한 사람들이 달고나를 모양대로 분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시간제한을 따로 두지 않았더니 병목구간이 되어서 나중에는 막 시작했더라도 한 번에 내보내고 바깥에 줄 서있는 사람들을 들여보내야 했다.
소맥은 무궁화 꽃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만 마실 수 있었다. 무슨 술인지는 간단한 단어로 소개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뺏기 위해 화려한 도구를 사용했다.
조명이 달린 소주잔을 6갈래로 나눠지는 트레이 아래에 두고 소주를 반 병 정도 부은 뒤 소주와 맥주를 섞는 것이었다. 소주와 맥주를 섞을 땐 준비한 소맥탕탕이를 이용했다.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막대가 진동하며 술을 섞는데 바로 거품이 올라와 보는 사람마다 신기해했다.
방을 온통 분홍색과 청록색, 하얀 구름으로 꾸몄더니 무서운 할로윈 분장들 속에서도 사진에 예쁘게 나와서 사람들이 게임을 하다 말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붙여놨던 천들이 떨어지고, 출발점을 표시해 둔 곳도 없어진 데다가, 사람들이 점점 취하기까지 해서 진행에도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뿌듯했던 건 다들 취한 와중에도 우리가 준비한 것들을 하나같이 좋아해 주고 재미있어했다는 점이었다.
짧지만 길었던 트릭 올 트릿 룸 행사를 마무리하자마자 코스튬 퍼레이드를 위해 행사장으로 향했다.
방을 정리하거나 쉴 시간도 없이 바로 시작되어 입고 있던 오징어 게임 진행요원의 복장 그대로 이동했다.
행사장에는 이미 할로윈 의상을 입은 사람이 가득했다.
우리 말고도 오징어 게임 콘셉트로 옷을 입고 있던 또 다른 참가자들도 만나 미리 짠 것처럼 무리를 지었다.
다들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는지 조금씩 이동하며 다른 사람의 의상을 구경하며 인사를 나눴다.
다소 정신없는 시작이었지만 어느 순간 무대와 관객석이 분리되며 진행자가 나섰다.
퍼레이드에서 본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코스튬을 입은 후보자들을 호명했다. 진행자의 마음대로 불렀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다음은 가장 재미있는 코스튬, 그리고 무서운 코스튬 후보자들을 불러냈다.
오징어 게임은 가장 무서운 코스튬 후보에 올라 우리도 무대 한쪽에 서게 됐다. 그리고 한 팀씩 나와 각 팀에서 준비한 장기자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 깊은 팀은 맨 워크(Man Work) 팀이었는데 맨 몸에 형광색 안전 조끼만 걸치고 복근을 자랑했다.
더 보여줄 게 없냐는 진행자의 말에 다 같이 팔 굽혀 펴기를 하거나 두 명이 함께 팔 굽혀 펴기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준비한 의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콘셉트까지 확실해서 여성들의 환호성과 모든 사람들의 웃음을 얻었다.
우리 팀은 따로 준비한 동작이 없어서 그저 관객 앞을 최대한 무섭게 지나가려고 노력한 게 전부였다.
할로윈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것뿐 아니라 관객들 앞에 서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질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할로윈 이벤트에는 그저 구경하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엔 할 수 있는 모든 행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미국인도 집을 꾸미고 이웃집은 방문하지만 호텔에서 하기는 어렵다. 호텔 방을 직접 꾸미고 수많은 방문객들과 함께 놀면서 할로윈을 몸소 체험한 것 같았다.
코스튬을 입는 것 정도는 쉽게 도전할 수 있지만 이 행사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하고 관객들 앞에서 선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코스튬을 입고 춤까지 췄으니 이벤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한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을 하루 동안 진행했으니 피곤함은 극에 달했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본 덕분에 이제 여한이 없다며 성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보기만 하는 것과 직접 참여하는 건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달랐다.
피로와 즐거움을 맞바꾼 것 같지만 흔치 않은 경험이라는 점에서 꼭 한 번은 해볼 만했다고 평하고 싶다.
만약 다음에도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더 준비해서 참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