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러 간 미국
할로윈 이벤트에는 더 페이머스 스캐어리 스트릭틀리(The Famous Scary Strictly)라는 특별한 대회가 있다. 스트릭틀리는 파트너가 고정된 대회 방식으로, 보통은 음악을 선택할 수 없지만 이 대회는 공연에 가까웠다.
파트너와 음악, 의상을 준비하고 관객들의 몰입과 이해를 돕기 위해 스토리와 관련된 영상을 틀기도 한다.
댄서라면 잘 알고 있는 스토리, 혹은 미국인이라면 알 수 있는 내용이나 드라마 등을 소재로 한 스토리에 음악과 춤을 더해 준비한다.
올스타(All-Star) 이상의 레벨에서 진행하는 대회로, 예선을 통과해야 본선에서 준비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다. 대부분은 본선에서 공연할 내용을 미리 정해두고 예선을 치른다.
예선은 임의의 음악에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일반적인 진행방식이라, 본선에서는 다르다는 걸 모르고 예선을 통과하면 하루 만에 무대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이벤트에 참가한 사람들의 다양한 할로윈 코스튬들이 있기에 아이디어만 있다면 의상이나 준비물들을 빌려서라도 충분히 멋진 공연을 준비할 수 있다.
실제로 하루 만에 준비된 무대가 있었다. 앞선 행사인 트릭 올 트릿 룸(Trick or Treat Room)과 같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소재로 구성한 무대였다.
대회 규칙으로 영희가 그린 라이트(Green light)라고 하면 춤을 추고, 레드 라이트(Red light)라고 말하면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춤을 멈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회에서 점수를 얻지 못한다는 설정이었다.
무대의 극적인 요소를 살리고 더 재미있는 상황을 위해 더 난도가 높은 동작들을 보였다.
팔로워가 한 발로 턴을 도는 중간에 멈추고, 팔로워가 리더의 손을 잡고 바닥과 가깝게 눕는 중간에 멈추는 등 아슬아슬한 동작을 보여줄 때마다 관객들의 감탄이 함께했다.
댄서들이 화려한 동작을 자랑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점수를 받지 못했고, 점수가 0점으로 표시된 순간 총소리와 함께 댄서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댄서들은 진행요원 복장을 입은 도우미들이 끌고 나가는 장면으로 무대를 마무리했다.
나는 마침 진행요원 코스튬을 입고 있던 덕분에 이 무대의 마무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쓰러진 댄서의 다리를 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 끌고 나가는 역할이었다.
내게 무대는 구경의 대상이었는데 단역으로라도 참여하니 무대들의 일부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고전인 타이타닉을 소재로 각종 명장면들을 춤과 함께 보여준 무대도 있었다.
Paul과 Janelle이 각각 잭과 로즈를 연기했고, <타이타닉>의 주제곡인 “My Heart will go on”으로 시작했다.
Paul이 Janelle을 스케치북에 그리는 장면은, 잭이 로즈의 초상화를 그리며 사랑에 빠지는 장면과 같았다. 몇 초 안되는 시간동안 그린 것은 졸라맨 같은 형태였지만 여자주인공의 특징이 더해졌다. 간단한 그림을 진지한 표정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어 더 큰 웃음을 주었다.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듯 달콤하게 춤을 추다가 Janelle이 양팔을 펼치고 Paul은 뒤에서 허리를 잡아주는 명장면도 표현했다. 오래된 영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봤던 덕분에 하나같이 알고있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로맨틱한 모습들을 춤과 함께 표현하다가 갑자기 음악이 전환됐다. 엑스트라들이 파란 천을 들고 춤을 추며, 그 뒤로 나무판자같은 튜브를 옮겨오며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한바탕 엑스트라들이 지나가고, "I feel like I’m drowning"라는 음악에 맞춰 튜브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배 위에서 춤을 추다 결국 Paul이 구르듯 밖으로 나와 파란색 천을 몸에 휘감았다. 남자 주인공이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Janelle은 배 위에서 느긋하게 누워서 하품하며 여유를 부렸고, 이 장면은 바닥을 구르는 Paul과 대조됐다.
Janelle은 특히 다채로운 표정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요 장면 순간순간마다 보이는 표정들이 도도하거나 익살맞아서 스토리와 극적으로 잘 어우러지거나 반전을 표현하는 바람에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댄서들만 이해할 수 있는 무대도 있었다. ‘전형적인 잭앤질(Typical Jack & Jill)’이라는 제목이었는데 꿈속의 꿈같은 느낌으로, 춤 속의 춤을 표현한 무대였다.
잭앤질(Jack & Jill) 방식의 대회에서 댄서들이 생각하는 내용을 미리 준비한 영상과 녹음한 음성으로 틀고, 행동은 직접 춤으로 보여줬다. 잭앤질은 순위에 들었을 때 공식적으로 점수가 기록에 남기에 그 어떤 종류의 대회보다 눈에 불을 켜고 춤추는 사람이 많다.
대회 시간은 한 사람당 5분도 안될 정도로 짧지만 익숙하지 않은 파트너와 음악 두어 곡만으로 평가받아야 하기에 모두가 긴장한다. 대회에 참가해 본 사람으로서 챔피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대회에 임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 무대는 Benji와 Victoria가 준비했고, 잭앤질의 본선에서 파트너가 정해지기 전에 각각 생각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서로가 파트너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뽑기에서 이름을 뽑았을 때의 행동은 너무 좋다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점수가 감점되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 중에는 긴장했을 때 숨을 크게 내쉬라는 마음의 소리나, 잘 모르는 음악이 나왔을 때 고민하는 생각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회를 참가했을 때에도 흔히 하는 생각이라 공감했는데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나 공감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들 비슷한 심정인 것 같다.
한창 춤을 추다가 딴생각을 하는 것도 있었다. 춤을 어떻게 추냐는 생각이 아니라 옷이 예쁘다거나, 같은 바지를 입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바지를 강조하는 춤을 추기도 했다. 춤이 끝나고 이 정도면 제법 잘 춘 것 같다며 자리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꼴등했다는 심사 결과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나만 근심걱정 가득한 상태로 대회를 치르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다니 다 비슷한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아주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챔피언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회 때의 생각을 들으니 챔피언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조니 뎁의 이혼 소송같이 미국에서 유명하게 회자된 사건을 소재로 해서 꾸며진 경우도 있었다. 관련 영상을 미리 준비해서 소송의 일부를 보여주고 술을 마신다거나 똥을 쌌다거나 하는 등 중요하게 언급된 단어들을 음악에서 찾아서 춤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다른 유명한 댄서들을 흉내 내서 그 댄서들이 자주 쓰는 동작들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고 영화 <호커스 포커스>, <스타 트랙>,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주제도 있었다. 대부분의 무대는 중간에 강조할 부분이나 진지한 순간, 혹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기억했던 부분에 음악이나 춤의 포인트로 표현해서 섞어냈다.
대회는 항상 즉흥적인 춤만 춘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적으로 공연 같은 무대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공연이 다 끝난 뒤에는 짧은 공연들을 연이어 본 것 같은 고양감이 들었다. 일부는 외국 문화나 개그코드 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대부분은 댄서라면 알만한 것들이었다.
즉흥으로 춤을 추는 걸 볼 때는 멋있다며 감탄만 했는데 스토리를 더하니 마치 춤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했다. 스토리 덕분에 기억에도 잘 남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도 쉬웠다. 줄거리가 더해지니 평소와 똑같이 춤을 춰도 더 몰입해서 보게 되어 어떤 것을 춤으로 표현하는지 이해하기도 좋았다.
스토리가 있는 춤과 즉흥적인 춤은 다른 카테고리 같지만, 스토리를 더해서 한번 보고 나면 다른 댄서들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전형적인 잭앤질’ 같은 무대처럼 직접적으로 생각을 설명하기도 하고, ‘오징어 게임’ 무대처럼 댄서들이 생각하는 점수의 의미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잘 보지 않지만 미국에서 유명한 영화나 이야기를 토대로 무대를 준비하니 이를 통해 미국의 대중적인 문화와 취향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