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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들, 풀리지 않은 고통을, 저녁이 되었으니

by 있는그대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날은 산행중이라 다음 날 집으로 온 즉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한강 작가의 책들은 모두 대출 중이었다. 서점에서도 품절이라는 안내만 붙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서야 다시 서점 진열대에 책이 차츰 꽂히고, 도서관에도 몇 권 돌아왔다. 비로소 손에 잡히는 한강의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한강작가의 책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오래전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낯섦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주인공 여자는 나무가 되어가려 하는가. 왜 그토록 깊고 어두운 길로 걸어가는가. 소설은 나에게 너무 낯설고, 너무 아프고, 너무 고통스러웠다. 읽어내는 동안 숨이 막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한강이라는 이름을 멀리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깊고 어두운 세계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이제는 내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겹쳐졌다.


그 후 나는 숨가쁘게 한강의 작품들을 읽어나갔다.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여수의 사랑>, <작별하지 않는다>, <흰>,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검은 사슴』, <노랑무늬영원>, <그대의 차가운 손>, <내 여자의 열매>, <눈물상자>, 그리고 오늘 다시 꺼내든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까지. 작품들을 차례로 읽을수록 한강 문학을 떠받치는 힘이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그것은 역사적 현실을 담아낸 무거운 진실, 그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고독과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문장들이었다.


특히 처음 읽었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채식주의자>가, 세월이 흘러 다시 보니 조금은 이해되는 느낌이 들었다. 몸과 마음을 통해 세계와 충돌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도리어 소멸을 선택하는 어떤 영혼의 절박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눈물상자>처럼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편안한 이야기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 책은 내 성향과도 잘 맞아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


하지만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달랐다. 처음 읽었을 때, 무슨 말인지 감을 잡기조차 어려웠다. 산문보다 훨씬 압축된 언어, 점점 더 내면으로 파고드는 느낌. 여러 번 되읽어야 겨우 손끝에 스치는 듯한 의미. 그래서 나는 시집을 덮었다. 그리고 1년쯤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펼쳐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노벨상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다시 손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번째 읽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의외로 처음보다는 편하게 다가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읽히는 건 아니었지만, 이해되는 구석이 조금씩 생겼다. ‘이 시는 오래도록 곱씹어야 하는 글이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제목부터가 쉽지 않았다.서랍. 저녁. 도대체 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고 했을까.서랍은 무엇을 보관하거나 밀어 넣는 곳이고, 저녁은 하루의 끝,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아직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들, 풀리지 않은 고통을, 저녁이 되었으니 잠시 서랍에 넣어 두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인생이란 결국 그런 끊임없는 임시 보관의 연속이 아닌가. 어쩌면 작가는 저녁이라는 시간의 의미로 ‘일단 내려놓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는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문장을 읽다가 오래 멈춰 있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은 무엇일까. 나는 문득 20대 초반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친구와 둘이 대청봉에 올랐던 날.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두려움도 없이. 젊음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고, 따지지 않고, 설레는 마음 하나로 산을 올랐던 그 순진한 무모함. 돌이켜보니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것 같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들은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밥을 먹고 하루를 살아낸다.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를 붙잡아 세웠다. ‘허무함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서시〉 역시 내 마음을 붙들었다.“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나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이 구절은 마치 작가가 아니라 나에게 한 질문처럼 다가왔다.

만약 정말 운명이 내 앞에 나타나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 답할까.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마음에 들지 않았어. 억울해서 울기도 했고, 왜 나만 이러냐고 원망도 했어. 피하려고도 했어.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너는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힘이기도 하더라. 헤어나올 수 없고 무겁지만, 이제는 미워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한강작가의 시를 빌려 내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다음 만난 시 〈괜찮아〉는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한강이 보여주는 ‘괜찮아’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격려이자,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숨 같은 말이다.

우리는 늘 “왜 그래, 왜 그래” 하며 살아왔다.문제가 생기면 이유를 따지고, 실수가 있으면 원인을 찾고, 마음이 다쳐도 설명을 요구한다.하지만 나이가 들어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사람은 ‘왜’보다 ‘괜찮아’가 더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60이 넘어서야 나도 누군가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는 내 삶의 태도 자체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한강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다.몇 번씩 곱씹고 포기했다가 다시 돌아와야 겨우 의미가 드러난다.가끔은 아무리 읽어도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감정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그러나 바로 그 ‘어려움’이 한강 문학의 힘이다.삶이 그렇듯, 고통도, 상처도, 치유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그러니 한강의 시가 어렵다는 말은 결국 “삶이 어렵다”는 고백과도 같다.


나는 앞으로도 이 시집을 몇 번 더 꺼내 읽게 될 것이다.서랍에 넣어 두었던 저녁처럼, 내 마음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다가필요한 순간 다시 꺼내어 볼 것이다.

그때마다 시는 다른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괜찮아. 지금은 서랍에 넣어 두어도 돼.”그 작은 위로 한 줄이, 오늘도 나를 살아가게 한다.


한강작가의 글은 여전히 내게는 무겁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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