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효과
첫째는 14개월 만에 동생이 생겼다.
아내와 나는 둘째 출산 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첫째가 불안해할까 봐, 질투심으로 삐뚤어지면 어떡하나 등. 둘째가 태어나도 무조건 첫째를 우선하자 다짐했었다. 그러나 둘째가 태어난 직후 호흡곤란으로 인큐베이터에서 지낸 1달 동안 온 정신이 둘째에게 갔었다. 퇴원 후에도 예민하고 잠도 없이 우는(데시벨은 고막이 찌질정도) 둘째의 존재감에 첫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달쯤 됐을 때 첫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동생을 때렸다. 집에서도 드러눕고 떼쓰기 일쑤였다. 심지어 동생이 울 때면 직접 가서 꼬집고 더 큰 목소리로 같이 울었다(혼자 있을 때는 잘 울지도 않았었다)
처음에는 동생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겠지 하며 달래며 넘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생떼의 발생빈도와 강도가 점점 증가하자 한 번은 혼쭐을 내야지 다짐했다.
그러다 그날이 왔다.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첫째가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동생을 한 손으로 안고 밥을 먹는 엄마에게 자신도 안아달라면서. 엄마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고성-울음-음식 던지기 삼단콤보를 시전 했다. 음식을 던지는 순간 나는 준비했던 컨틴전시 플랜을 개시했다. 내가 구상했던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다(책과 유튜브를 짬뽕해서 만든 순서다)
1. 공간분리(울음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기)
2. 공감해 주기(속상한 이유 질문)
3. 잘못된 행동 알려주고(타이르는 말투)
4. 사과시키기(엄마에게)
먼저 그녀를 작은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다 울 때까지 아빠가 기다릴게'라고 말하려는 순간 첫째는 악이 한껏 받힌 표정으로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괴성을 질렀다. 귀에서 이명소리가 날 정도로 큰 소리로. 나는 첫째를 들고 신발장으로 장소를 옮겼다(좀 더 어둡고 가족들로부터 떨어진 곳이라 판단)
거기서 다시 4단계 훈육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첫째는 더 심하게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그때부터 나도 화가 났다. 현관문 밖에 데려갔다. 그것도 안돼서 아파트 계단으로 데려갔다. 어두 껌껌해 약간 무서웠는지 울음이 약간 사그라들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다그치며 소리쳤다.
'그건 나쁜 행동이야' '때 쓰지 마' '소리치지 마' '뭐 하는 짓이야'등 계획에 없던 감정적 언행을 쏟아부었다. 그중 하나가 '엄마는 팔이 아파 널 안아줄 수 없어'였다. 아내는 두 번의 출산으로 몸이 많이 망가졌다. 특히 손목 인대가 많이 늘어나 무거운 걸 들 수 없는 상태였다. 둘째는 아직 가벼웠지만 첫째는 10kg이 넘었기 때문에 들지 않기로 정했다(첫째에게도 수없이 알려줬다)
여하튼 말하면서도 아직 엄마, 아빠 수준의 말밖에 못 했던 첫째에게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다.
근데 그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동생은?'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동생은 안아주면서 도대체 나는 왜 안된다는 거야'라는 의미로 들렸고 그게 내 마음을 내리쳤다.
그 순간 이제껏 첫째에게 했던 말들(양보해야 해, 넌 안아줄 수 없어, 소리치지 마, 같이 울지 마 등)이 떠올랐다.
대부분 동생도 하는 행동인데 첫째에게만 금지하는 말을 했다. 정신을 차려 정면을 보니 첫째는 맨발로 어두컴컴한 계단통로에 서있었다. 고사리만 한 발가락과 눈물 주렁주렁한 아기얼굴이 보였다.
내가 두 살도 안된 아기에게 뭘 하고 있는 거지?
심리학 용어 중 망원경효과가 있다. 최근일과 과거일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에 발생한 사건이 실제보다 좀 더 이전에 발생했다고 느끼고, 반대로 과거에 발생한 사건은 실제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현상이다. 비슷한 심리학 용어로 시간수축효과가 있다.
위 관점에서 보자면 첫째와의 시간이 왜곡되어 있음은 자명하다(다만 나의 시간왜곡은 시점보다 기간인듯하다) 첫째가 언니가 된 기간은 고작 몇 달 남짓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가 처음부터 언니인 것처럼 대하고 요구했다. 반대로 둘째는 구급차에 이송돼 인큐베이터에 갔던 시절이 강렬해 아직도 숨 못 쉬는 아기처럼 대했다.
이런 왜곡이 이해 안 되는 첫째는 더 예민해지고 생떼를 부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신을 봐달라는 말 못 하는 아이의 표현 아니었을까.
한번 첫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엄마가 한동안 사라졌다가(조산으로 3주 입원) 갑자기 아기를 데리고 왔다.
'네 동생이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게 언니라는 꼬리표가 붙여졌다.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양보, 희생, 책임 등 요구조건도 밀려왔다.
이제껏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배신당한 느낌이다(어떤 이는 폐위된 왕에 비유하는데, 적절한 비유다)
아직 적응도 못했는데 아빠는 마치 내가 오랫동안 언니였던 것처럼 말하며 혼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울고 소리치는 것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마음이 아팠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둘째가 생기고 '첫째를 위한 육아' '슬기로운 동생 맞이하기" 등 방법적인 것들을 많이 찾아봤었지만 정작 마음 다해 첫째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이제는 언니, 첫째 등 꼬리표를 떼고 있는 그대로 대해야겠다 다짐했다.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첫째는 아직 아기니까.
그 후 망원경을 벗어던지고 첫째를 있는 그대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요구하지 않고, 책임을 씌우지도 않았다. 내 노력이 무색하게 첫째의 땡깡은 지속됐고 하루에 몇 번씩 중재하고 훈육하는 게 여전히 힘겹다. 그래도 내가 첫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아이의 행동이 바뀌는 여부에 상관없이.
어느 날 저녁 둘째는 잠들고 첫째는 아직 깨어있었다. 10시가 넘으면 도깨비아찌가 찾아오니까 무조건 자야 한다는 게 우리 집 구전동화다. 첫째는 잠들지 않았지만 눈감고 뒤척이고 있었다. 아내와 한참을 얘기하다가 슬쩍 첫째를 보니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 같아 확인차 물었다. '자니?' 그녀는 3초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게 떨리는 눈썹과 굳게 다문입에는 진중함과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최근 도깨비 아저씨를 무서워한다) 아내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아가며 끅끅 거렸다. 그녀는 그렇게 3번을 눈을 감은채 끄덕임을 반복했다.
참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아이가 잠든 후 거실로 나오면서 언젠가 산책하며 만난 할머니가 "너도 아기면서 벌써 동생이 생겼네 어떡하니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들었는데 참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첫째가 태어난 날 처음 안아줬을 때, 너무 작고 가벼워 조심스러워떤 기억이 났다.
동생이 생겨도, 어린이집을 가도 내가 전적으로 사랑을 줘야 할 아기라는 사실을 다시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