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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빙워터 Sep 18. 2023

웃는 얼굴, 카이로스의 시간

제주도 노을 같은 순간들

둘째는 전형적인 왈가닥이다. 우렁차다 못해 이명을 유발하는 목청, 민첩한 뒤뚱거림, 수백 번도  찧은 뒤통수, 과격함에 반응하는 그녀의 말초신경. 그녀가 아들 같은 딸이에요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는 수없이 많다. 원체 에너지레벨이 높아 한순간도 가만히, 지긋이 있는 꼴을  적이 없다 결단코(첫째와 너무 다른 부분이고 둘이 싸우는 주된 이유다) 둘째의 매력은 사진보다 비디오에 적합하다.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기 위해선 비디오 녹화가 필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감상하며  순간은 영원했으면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웃을 때다.


부모가 되기 전에 선배들에게 종종 들었던 레퍼토리가 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녹아내려. 삶의 이유를 방금 발견한 것 같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또 다른 힘이 솟지. 아기 낳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감정이지. 꽤 동경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경청했었다. 그러나 일과 육아의 병행이 현실이 되니 그들의 말에 강력한 불신이 튀어나온다. 피로가 녹아내렸다는 그날은 분명 30분도 애를 안 봤을 거야. 젖병을 씻지 않고, 씻긴 후에 다시 응가하지 않고, 눕히자마자 잠들었던 매우 희귀 한 날이었을거야.  그런날 아이의 미소를 봤다면 나도 좋게 반응할 수 있겠지라며 툴툴거린다. 아이의 미소를 보면 좋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힘들고 욱한다. 그날 전까지는.


그날도 한참 피로에 절어서 육아 마무리 단계인(퇴근 후에는 먹이기, 치우기, 씻기기, 재우기로 4단계가 있다) 씻기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서두에서 말했듯 둘째는 목청이 크다. 그냥 큰 수준이 아니다. 파바로티 뺨칠 정도로 커서 평소 귀가 안 좋은 나는 진짜 버티기 힘들다(심하게 소리치는 날은 이명이 들린다) 특히 소리가 울리는 욕실에서 샤우팅을 시전 하면 귀가 아파 짜증이 날 정도다. 그날도 물이 발목까치 차오른 욕조 안에서 짜증 섞인 샤우팅을 시전 했다. 회사격무로 유독 힘들었던지라  그 데시벨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녀의 주의를 돌려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이렇게 외쳤다. 우꽈삐도꺄꽉앜. 뇌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낸 천상의 소리가 즉흥적으로 튀어나왔다. 샤우팅 하던 그녀는 3초간의 상황파악 후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가히 천하대장군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헛소리를 따라 하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냥 이 순간이 멈춰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느닷없는 바람이 내 마음을 댕댕 울렸다. 그 웃음을 다시 보고 싶어서 다시 말했다. 오콱이큣아뻬쿜꽞. 이번에는 케켁 거리느라 평소의 복식발성도 생략하고 생목으로 웃더라. 비디오보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렇게 목이 아파서 더 이상 못할 때까지 한참을 욕실에서 둘째와 괴랄한 소리를 내며 놀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디오를 안 찍었더라.


예전에 제주도 노을하늘을 보면서 생각을 한적 있다.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영원도 질리지 않겠다. 천국 갈만하겠구먼. 유독 그날 제주도의  붉분홍 노을은 영원 같았다. 그후로도 더 아름다운 풍경과 절경을 봐도 영원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심지어 같은 제주도 하늘도 그때의 감동은 없다) 당일의 온습도, 내 기분, 체력, 정신상태, 함께 있던 사람들 등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 느꼈던 순간으로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그날 아이를 재우면서 제주도 하늘이 떠올랐다. 아 우리 둘째가 웃는 그 순간이 영원한 순간이었구나. 카이로스라 했나.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 즉 크로노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들. 둘째가 웃는 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열렸던 거다. 제주도하늘을 감상했던 그 순간처럼. 그 후로 나는 필사적으로 둘째를 웃겼다. 말로도 웃기고, 간지럽혀서 웃기고(요즘 내가 한참 빠져있는 놀이다. 두 팔을 얼굴옆에 붙잡고 턱으로 간지럽힌다) 그녀가 웃어재낄때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찾아온다. 행복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영원한 행복이 좀 더 나으려나.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둘째뿐 아니라 첫째의 웃음도 발견한다. 또 다른 카이로스의 시간이 열린다. 매일같이 그날의 제주도 하늘을 감상하는 꼴이다.  나는 복에 겨운 일상 한복판에서 살고 있었구나. 오늘도 두 딸의 웃음을 보는 것이 내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아  참고로 하루종일 딸들의 웃음을 보고 있어도 피로는 녹아들지 않고 쌓이더라.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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