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에릭슨의 기본가정법 질문
첫째가 두 돌이 지나고 막무가내로 떼쓰기 시작했다. 말이 유창해지면서 자신의 좋고 싫음이 분명해졌다. 분명 축복해야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싫음이 막무가내가 될 때 피가 거꾸로 솟는다. 초콜릿을 먹고 이빨 닦아야지 하면 싫어라고 외친다. 잘 시간이 한참 넘었는데 자야지 하면 싫어라고 외친다. 인내심을 가지고 갖은 설득과 회유로 어찌어찌 그 순간을 넘기면 또 다른 '싫어'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한두 번은 인내심과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대하지만 똑같은 게 몇 번 반복되면 욱하고 감정적인 훈육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 끝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범벅된 아이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난 이것밖에 안 되는 부모인가 후회가 밀려온다. 아이에게 사과하고 반성 가득한 다짐을 함께 외친다. 내일부터는 우리 서로 잘하자 파이팅. 하지만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싫어가 난발되고 분노-울음-후회-다독임 순으로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무한루프에 갇혀버린 듯한 무력감이 나를 더욱 지치게 한다.
나는 육아하면서 육체적 힘듦과 정신적 스트레스 중 뭐가 힘드냐 물으면 주저 없이 '정신'이라고 외칠 거다. 정말 정말 미쳐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수 없이 반복되는 막무가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오은영박사님을 비롯한 전문가의 갖은 조언들을 탐구하고 적용해 보지만 내 아이는 해당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전부 다 다르니까.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꼭 해야 하는 걸 막무가내로 싫다고 할 때다. 아이도 안다. 이건 해야 하는 거라고. 그러나 그 순간이 오면 일단 떼를 쓰고 본다. 회유하고 혼내고 달래는 과정이 보통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한 사이클을 돌면 진이 빠진다. 그러나 어김없이 다음 '싫어' 순간이 찾아온다. 원칙을 포기하면 안 되냐 하는데 애를 키워보시라. 그게 가능한지. 그러던 중 심리학 책을 읽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만한 글귀를 읽었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 밀턴 에릭슨이 자주 쓰던 대화기업인데,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행동을 기본전제로 깔고 질문을 하면 청자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된다는 게 골자다.
예를 들어보자. '이 모델이 제일 싼 물건이니'와 '이 모델이 제일 싼 물건인걸 알고 있었니'라는 질문은 비슷한 것 같지만 대답이 천지차이로 다르게 나온다. 전자는 물건이 싸냐 아니냐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 후자는 알고 있나 몰랐냐에 대한 답이 나온다. 후자의 경우 물건이 싸다는 건 자연스레 전제하고 알고 있는지 아닌지만 생각한다. 정말 쌌는지 아닌지 비판적 사고로 따져봐야 하는데 엉겁결에 이 물건이 싸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었나 몰랐나 라는 사실에 뇌의 초점이 맞춰진다. 읽으면서 머리가 핑핑 돌기시작했다. 뭔가 내가 갇힌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낼 유레카를 찾은 것 같아서.
그 후 아이가 떼쓰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 식탁에서 밥 안 먹고 당장 초콜릿을 먹는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밥 먹은 후에 주기로 약속했었다) 옳다구나 드디어 때가 왔구나. 준비했던 질문을 툭 던졌다. 너 밥 먹고 초콜릿 먹을래 아니면 밥 먹고 초콜릿 안 먹을래? 막상 뱉었지만 참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이런 말장난이 진짜 먹힐까 스스로 반문했다. 3초의 정적이 흘렀다. 첫째의 복잡한 표정을 보는데 심장이 쫄깃거렸다. 먼 말 같지 않은 소리야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아빠로서의 권위는 이제 끝인가. 별 생각이 다 들고 후회가 밀려올 때쯤 대답이 들려왔다. 밥 먹고 초콜릿 먹을래. 그러고 수저를 들어서 밥을 먹는 거다. 신기했다. 아니, 이게 진짜 된다고? 20분간의 분노-울음-후회-다독임의 사이클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스킵가능하다니. 아 놀라웠다. 질문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런 기적이 찾아오다니. 오펜하이머의 핵 실험 성공만큼 큰 감동이 폭포수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곧 의심병이 도진다. 혹시.. 우연 아닌가?
그 후로 아이가 떼쓸 때마다 기본가정 질문을 던져봤다. 양치하기 싫어. 아 양치하기 싫구나, 그러면 파란 색깔 칫솔로 양치할래, 분홍색깔 칫솔로 할래? 음.. 분홍색깔로 양치할래. 이럴 수가. 체육복 입고 가기 싫어 핑크색치마 입고 어린이집 갈 거야. 오늘 체육활동하는 날이니 체육복 입고 가고 집에 와서 핑크색 치마 입을까 아니면 집에서도 체육복 입고 있을까? 음.. 갔다 와서 핑크색치마 입을래. 참 놀랍다 못해 경이로웠다. 이게 진짜 먹히는구나.
돌이켜보니 이제껏 아이와의 갈등이 내 무지함에서 비롯된 거다. 우주 같은 아이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와의 대화 방식은 충분히 개선 및 변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 육아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서. 기본가정화법 외에도 무수히 많은 심리법칙과 개념이 있는데 내가 적용할 수 있는 게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 육아는 얼마나 더 고급스럽고 개선될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