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기

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by 혜윰

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비가 내린 다음 날, 혼자 산책을 나왔다.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인 산길은 내 생각보다 훨씬 어둡고, 축축했다. 한 발 들어서니 시원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 나무들은 훨씬 오래전에도 이 자리에 있었겠지. 누가 돌보지 않아도, 혼자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키워내며 이곳을 지켜온 거겠지.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이 나무들은 여전히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 혹은 아이들과 산책을 나온 적은 많았지만 혼자 산을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나를 앞질러 걷는 사람들을 보내고,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어 내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초록 초록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제 정말 여름으로 접어들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며 걷고 있었다. 낯선 행동이면서도, 왠지 익숙한 행동이었다. 내 옆에는 뜀박질하며 나를 부르는 아이도 없고, 왜 이렇게 느리냐며 재촉하는 남편도 없었다. 나는 혼자 걷고 있었고, 산책길엔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결혼 전, 퇴근할 때, 집에 들어가는 길에 느꼈던 왠지 모를 불안감과 무서움이 급격히 몰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 뒤에 오던 사람은 그냥 지나갔고, 나는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남자라서 좋겠다.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니까. 여자만 산책할 수 있는 코스는 없는 건가? 내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온 게 문제인가? 산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는 탄천으로 갔어야 했나?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지금은 낮이야. 여긴 너에게 익숙한 곳이야. 그저 사람들은 산책을 하러 왔을 뿐이야. 가던 길을 돌아서 산책로 입구 쪽으로 가니 가족 단위의 사람들도 많이 보였고,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서둘러 돌아온 내가 좀 어이없기도 했고, 허탈하기도 했다.

산등성이에 오르자 내가 사는 동네와 아파트가 저 멀리 보였다. 내가 저기 살고 있었구나. 멀리서 보는 그 동네는 생각보다 아담해 보였고 그래서 안락해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조금만 벗어나도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데 매일 저 짧은 길을 왕복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꿈꿔왔던) 안정된 삶을 사는 듯 보이기도 했고, (결국 세상과 타협했으니) 나약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혼자 걷는 길에는 내 생각을 방해하는 아이도, 남편도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세탁기 알림 소리도, 다음 식사 메뉴 고민도 없었다. 그저 계속되는 길. 그리고 걷는 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불안도 함께 있었다. 혼자 해 낼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 혼자 있는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사이로 해가 보이자 나뭇잎이 반짝거리며 흔들거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혼자 걷는 것, 참 좋은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