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나는 1시 40분에 아이 학교 앞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수영가방을 가져다줘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 갈 때 가져가도 되는 수영가방은 부피가 크다는 이유로, 내가 출근하기 전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이유로, 또 내가 수영 스케줄을 변경하는 전화를 안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에 아이에게 "수영가방을 주러" 도착해있어야 했다.
12시 30분. 저녁 메뉴로 카레를 만들었다. 재료를 볶고 물을 부은 다음, 끓는 동안 어제 사 온 반찬을 꺼내서 점심을 먹었다. 1시 10분. 준비해야 되는데 설거지도 해야 하고, 밥도 해 놔야 한다. 양치하고 옷 갈아입고 거실 대충 정리하는데 시간이 없다. 1시 40분. 전화가 온다. 아이가 어디냐고 묻는다. 결국 늦었다. 짜증이 난다. 그깟 수영가방이 뭐라고! 나는 수영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아이를 데려다주고서야 밥을 해 놓지 않은 게 생각났다. 짜증이 치솟는다. 집에 다시 가야 한다. 그냥 출근할 수도 있다. 밥이야 남편이 퇴근해서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분명 깜박했다고 하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쁘냐는 카톡이 올 거다. 그게 더 싫다. 나는 결국 다시 집에 가서 예약 취사를 눌러놓고서야 출근을 한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나는 왜 "짜증"을 내는가? '내'가 선택했고, '내'가 깜박한 일을 나는 왜 문제라고 하는가? 이런 실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것 아닌가? 뭐 대수라고? 하지만 내 하루는 위와 같은 일이 조금씩 다르게 계속 반복된다. 나는 몸은 '집'에 있지만 정신은 '학원비 명단'에 가 있고, 몸은 '학원'에 있지만 정신은 '내일 유치원 준비물은 없는지' 기억해내려 애쓴다.
나는 왜 내가 지치고 우울한지 설명하기 힘들다. 내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면, '내 상태'는 그럼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내 생각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여성의 언어'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주부들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 다룬다. '먹고 사는 데' 고민할 필요 없이 '완벽한 아내' 역할로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삶. 그런데도 왜 그들은 여전히 괴롭고 우울한가?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정말로 필요하거나 중요한 일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도 극도의 긴장이 하루 종일 나를 몰아치죠. 하지만 난 그래도 동네에서 여유로운 주부라고 생각해요. 많은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더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하니까요.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서 제자리로 왔고, 가정주부들은 다시 다람쥐 쳇바퀴에 걸려들고 말았죠. 그 쳇바퀴가 이제는 고급 유리와 두꺼운 융단으로 장식된 목장의 대저택이나, 편리한 현대식 아파트로 바뀌기는 했지만요."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시대가 변하고, 장소가 변했지만 위의 문장은 아마도 이렇게 변주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등원하고 나면 제멋대로 벗어둔 내복을 주워서 빨래통에 넣어요. 장난감, 색연필을 정리해서 제자리에 놓죠. 장난감은 아이 방에. 책은 책장에, 그러면 뭐 하나요. 아이가 하원해서 돌아오면 금방 어질러져요. 출근을 하지만 바로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저녁 반찬 중 빠진 건 없는지. 밥은 해 놓았는지. 제가 없어도 물건을 찾을 수 있도록 다 '제자리'에 있는지 신경이 쓰이거든요. 그래도 저는 아이들이 조금 커서 수월한 편이예요. 저녁에는 아이들 아빠가 밥도 챙겨주고 가끔 씻겨도 주니까요. 그 덕분에 제가 일을 할 수 있죠."
내 삶에 다른 대안이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건 아이가 '자라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아니다." 이건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남편의 문제도 아니다. 바로 나의 삶이고, 나의 문제이다. 내가 이 문제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것에도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베티 프리단이 1963년, 한 여성에게 적어준 문구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이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적어도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는' 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