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곰곰 더듬어 보니 ‘열패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자기 주체적인 삶을 고민하고, 여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고 나 자신만의 삶을 찾고 싶어 글을 쓰고. 뭔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고, 내 행동 내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라 여겼고,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저 한 명의 며느리일 뿐이었다.
가부장제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넌 제일 아래에서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일 뿐이야. 네가 뭔데 본모습을 여기서 꺼내놓으려고 하니?
시댁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일까. 아니라는 대답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우리 며느리는 뭐든 그저 좋대."라는 시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시댁에 갈때는 미리 준비한다. 웃는 얼굴을. TV를 보거나 가만히 있을 때도 항상 미소를 띠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부지런하지도 않고, 살림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기분 좋은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어머니가 요리를 다 하셔도 무조건 옆에서 서성거리고 필요한 게 없냐고 묻곤했다.
이번에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미소 코르셋'을 벗었다. 밥 먹고 나서는 내 몫의 설거지를 하러 일어섰다. 굳이 식탁에 앉아있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애써 화제를 만들어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의 나와 비슷하게 행동했을 뿐이었는데, 남편이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남편은 시댁에 도착하면 스위치가 딸깍, 하고 꺼지듯 누군가의 남편이 아닌 누군가의 아들이 된다. 나와 해왔던 말들, 행동들은 아버지를 맞춰주는 호탕한 아들. 아내 대접 잘 받고 살고 있는 남편으로 바뀐다. 어쩌면 그게 제일 힘든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던 방식을 버려야 하는 게. 반면 남편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시 내 아들”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남편하게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남편은 자주 가는 것도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맞춰준다고 대답했다. 그건 누구한테 좋은 거지?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가 좋다면 그건 진짜 좋은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또 좀 부끄러워졌다. 그게 이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었으므로. 희생하는 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부당하지만, 나의 좋음은 또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좋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댁 어른들이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엄마, 아빠가 아내를 좋게 평가해 줬으면 하는 것. 아내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노력했다. ‘예약이나 하’라는 말을 들어도. ‘우리 아들 힘들게 일 다시키냐’는 말을 들어도. 웃으며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제가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당신들의 가족에서 나는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해도. 그것을 굳이 확인시켜주는 절차는 끝나지 않았다. 매번 갈 때마다.
남편은 뭐가 문제냐고 물을 것이다. 왜 기분이 안 좋냐고.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싫으냐고. 왜 우리 부모님 무시하냐고. 아니, 내가 너네 부모님 무시하는 게 아니고 너네 부모님이 나를 인간 취급 안 하는 거라고. 그러면 또 묻겠지. 언제 그랬냐고 말해보라고. 우리 부모님은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라고. 네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아, 이 열패감의 도돌이표.
나는 이미 지는 싸움을 선택했다. 하지만 계속 싸울 것이다. 아직 시댁 식구들과의 삶의 여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나를 위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