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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11. 2023

익숙함이 낯섦으로 변하는 순간

이미상, <이중작가초롱>

미친 소설을 읽었다. "엄청나게 강력한 소설"(전승민 평론가), "불가사의한 소설"(김하나 작가) 라는 멋진 평가도 있지만 글쓰기 실력이 짧은 나로서는 미쳤다는 말 밖에 할말이 없네 ㅎㅎ 뭐 그러니까, 좋은 쪽(?)으로 미쳤다는 말이다.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현실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가장 더럽고 추한 검댕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 소설을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전과는 다르게 뭔가 낯설어보이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소설집의 평론을 맡은 전승민은 "동시대인의 소설-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둠을 보는 자"라고 보다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음'으로써 살아가고 있을까. 대부분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선별적으로 볼 것이다. 아니, 세상이 이미 그런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유튜브는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통해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영상, 비슷한 영상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그 속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수없이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사건에 전혀 다른 꼬리표가 붙는다. 시대에 따라 '예전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초롱은 자신의 불행에 혁명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은 자신의 책임이고 반은 혁명의 책임이다. 하지만 혁명기에는 반만 처벌되지 않는다. 그래서 초롱은 전적으로 억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중 작가 초롱>은 (어쩌면) '피해자다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직 나는 이 개념이 완전히 소화가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어느정도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그래서, 누가 잘못했다는거야? 하지만 내 질문은 틀렸다. 그러니까, 피해자다움이라는 게 실체가 있어? 라고 물었어야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 초롱은 불법촬영 피해자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소설을 써서 주목받는다. 그러나 그 전에 썼던 습작이 온라인상에 퍼진다. 같은 소재로 썼지만,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은' 소설이었다. 화살은 초롱에게 꽂히고, 독자들은 초롱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소설이 유출된 후로 초롱은 잠을 자지 못한다. "누가 그랬을까?" 답을 찾기 위해 습작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소설의 결말은 '수많은 초롱'이 나타나면서 마무리 된다. 이 사건 이후 전국의 불특정 다수가 '초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것이다. 문단에서 매장당할 뻔했던 초롱은 오히려 다수의 초롱이 나타나면서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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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다를까 수진의 머리가 곧 반으로 쪼개진다.

처음은 아프다. 쪼개지는 순간은. 사과 머리를 칼로 탁, 칠 때 사과가 느낄 법한 통증이다. 쪼개진 머리가 밖으로 동그랗게 말리고 갈라진 얼굴이 흘러내린다. 난초 잎처럼 힘없이 벌어져 덜렁대는 얼굴 두 쪽. 얼굴 Ⅰ,Ⅱ의 탄생.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이 책이 나에게 즐거움과 통쾌함을 안겨준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여성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여자가 지하철 할때>와 <살인자들의 무덤>을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이럴 때 내 문장의 한계를 절실히 느낌.. 재밌었다는 표현말고는 없는 거냐!!) 

수진과 얼굴들이 "셋 다 죽도록 피곤한" 수진과 얼굴들이 지하철에서 내린다. 수진은 "믿을 수 없다. 오늘 나와 한 일이 이십 분 동안 지하철을 탄 게 다라는 사실을," 물론 수진이 지하철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감각은 수진의 입장에서는 재미라고 할 수 없는거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수진아! 너 정말 대단해! 그리고 매일 살아 돌아온, 우리도 정말 대단해! 라고 (맘속으로) 외치며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 조지 손더스의 "압축은 예의이자 친밀감의 한 형태이다."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단편소설이란 미술시간의 접이식 물통 같다"라고 말한다. "쓰는 사람은 마음에 품은 긴 이야기를 짜부라뜨려 압축한 소설로 건네고, 읽는 사람은 그 소설을 펼쳐 가려져 있던 주름의 이야기를 읽는다. 아니, 주름에 자신을 이야기를 써 넣는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불현듯 소설의 인물들과 마주치곤 했다. 길을 걷다가 한적한 골목에 접어들면 <여자가 지하철 할 때>의 수진이. 아이브 춤을 연습하는 아이를 보고 "너 커서 딴따라 할래?"라는 말을 하는 남편을 보며 만약 규라면 뭐라고 할까,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채워본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냉소적인 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마주 보게 하는 책. 그래서 아무나에게 권하기는 조금 망설여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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