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는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에게서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위의 시선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저 지금 그 자신은 걸을 힘이 없을 뿐이었고, 계속해서 과거의 일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왜 자꾸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납득을 할 수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민혜에게 정말 진심을 쏟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태아시절 엄마에게 얻은 양분과도 같고, 자신이 어린 시절, 깊은 사랑을 쏟아준 외할머니의 애정 어린 손길과도 같았다. 그와 그녀는 하늘이 맺어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민혜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민혜는 단 한 번도 선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했다. 민혜는 세 달 후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다. 이제 그만 더는 자신을 잊어달라는 말과 함께...
선호에게 피붙이라곤 소식이 끊긴 삼촌이 전부다. 부모님은 선호가 대학생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삼촌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모른다. 서로 먹고사는 게 바빠서 어느 순간 소원해졌고 연락이 끊겼다. 그런 그에게 사랑은 전부였다.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와 추억을 쌓는 일들은 지루한 일생에 생기를 돌게 했다. 그녀들이 선호를 힘들게 하고 매달리게 만들고 진이 빠지게 하더라도 그마저도 좋았다. 선호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벌써 세 번째, 서른을 앞둔 나이에 그는 또다시 사랑을 잃고 말았다. 사랑이란 게 도무지 뭔지 모르겠다는 자괴감만 밀려왔다.
오늘 선호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다. 단정한 세미 정장을 입고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민혜를 만나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갔다. 예쁜 반지도 준비했다. 그런데 민혜는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민혜의 눈꼬리는 미세하게 계속해서 흔들렸고 그의 불안과 내면의 소용돌이를 숨기는 듯해 보였다. 선호는 민혜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민혜야, 오늘 많이 수척해 보인다.”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내가 널 위해 준비한 게 있는데...”
“아...”
민혜는 피곤해 보이는 기색으로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지 않아?”
“나 할 말 있어. 사실 그 말하려고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한 거야.”
“마지막?”
“아니. 사실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 오빠가 너무 부담이 되고 짜증 나. 그런데 아무래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예의란 생각이 들어서...”
“잠깐만. 잠깐만. 나도 할 말 있어.”
“내가 먼저 할게. 우리 그만 헤어지자. 사실 나 곧 있으면 결혼해. 3개월 뒤야.”
“뭐라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빠가 너무 질척거려서 말을 못 했어. 이제 그만 나를 귀찮게 해 줘. 나는 할 말 다했으니깐 간다.”
“신민혜! 민혜야!”
선호는 휙 돌아서서 가는 민혜를 망연자실한 채 바라볼 뿐이었다. 민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레스토랑 회전문을 빠져나가 사라져 버렸다. 선호는 날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꾹 참았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꽃다발도 반지도 선호의 손이 스르르 풀리면서 식탁 밑으로 떨어졌다. 뒤로 나자빠진 의자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꽃다발과 반지가 선호의 쓸쓸하고 처절함을 더욱 부각해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