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나 자전적 소설이 아닌 이상, 글을 쓰다 보면 상상력이 가미되기도 합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이 조현병 환자라고 해서 한강 작가가 조현병이 아니듯이,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게이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박상영 작가가 게이라고 확언할 수 없듯이, 작가와 작중 화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저도 사랑에 관한 시를 쓰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고, 가난한 화자를 설정해 고통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 상상의 결과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받아서 챗gpt에 이를 주제로 설득력 있는 에세이 한 편을 요청했습니다. 수준 높은 에세이를 보니 굳이 제가 다시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대로 올립니다.
작가와 작중 화자는 다르다
- 문학 속 진실과 허구의 경계
문학은 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와 화자는 동일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동시에, 작가가 의도한 ‘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작가와 화자는 동일하지 않다. 작품 속 화자는 작가가 빚어낸 가상 인물일 뿐, 그것이 소설이든 시든 그 인물의 경험과 감정은 작가와 일치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여러 작품을 통해 이 경계를 이해하는 것은 문학을 보다 풍부하게 즐기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첫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의 주인공 싱클레어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은 청소년기의 방황과 자아 찾기를 묘사하는 독백 형식의 소설로, 주인공의 고뇌와 성장 과정을 통해 독자는 헤세의 개인적인 체험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싱클레어는 헤세의 복사판이 아니라, 헤세가 창조한 또 다른 인물이다.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아 성찰과 성숙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헤세 개인이 아닌, 싱클레어라는 캐릭터가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과 감정을 통해 표현된다.
둘째,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서도 박완서와 작중 화자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속에서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그리며, 작가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듯 보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상상력과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느끼게 하지만, 작가 자신을 작품 속 인물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오히려 문학적 의미를 축소할 수 있다.
셋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살펴보자.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목소리와 겹치는 듯 보이나, 닉 역시 그저 피츠제럴드가 선택한 관찰자일 뿐이다. 닉의 관점에서 개츠비의 화려함과 허망함을 탐구하지만, 피츠제럴드 개인이 개츠비나 닉과 같은 선택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작품은 화자의 시선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그 속에서 허구와 현실이 공존하는 세계를 만든다.
넷째,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반체제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또한 애트우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오프레드가 겪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경고와 상상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애트우드는 작품을 통해 여성이 억압받는 미래를 그리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애트우드를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와 화자는 분리된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문학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작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다양한 화자를 통해 들려주지만, 각 작품 속 화자는 독립된 인물로서 살아간다. 이 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문학이 단순한 자전적 기록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예술로서의 깊이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학 속에서 진실은 곧 허구의 모습을 띠고, 허구는 다시 진실에 닿는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