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은, 햇빛 아이처럼 밝고 명랑한 시절도 떠올릴 수 있는 반면, 그림자 아이처럼 분명 어두운 시기도 존재했다. 그건 마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악당 크뢰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자신이 알던 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은 그런 경험이었다.
부모님의 과보호 안에서 자란 나는, IMF직후인 6학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뉴스에서 우리나라 학교에서 왕따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접했고, 같은 반 학생을 누군가가 따돌리려는 걸 목격했다. 그렇게 나 또한 친구들과 절교와 화해를 반복하며 힘든 시절을 보냈고, 중학생이 되면서 그 상황은 심각해졌다. 출산 휴가 들어간 담임 선생님 대신 임시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바뀌었으며 우리 반 남학생과 수학 선생님이 매일같이 싸우고 고성이 오갔고 우리는 단체로 책상 위에 올라가서 과학선생님의 체벌을 받아야만 했다. 학생들은 서로 뺨을 때리고 돌아가면서 따돌렸고 나 또한 그 타깃이 되어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건 끝이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학교급이 바뀔 때마다 악당 같은 학생은 꼭 2~3명 있기 마련이었으며 자신은 선량하다고 믿는 대다수 학생들은 방관자이거나 심할 경우 조력자가 되면서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됨으로써 그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진정 욕망하는 것과(셀프가 원하는 것), 사회적인 가면을 쓰며 원하는 것(에고가 원하는 것)을 쉽게 혼동한다. 그러니깐 사회적인 페르소나가 두터울수록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고 한 세계를 깨트려 자신만의 신화를 써 내려갔듯이 우리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진정한 셀프로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에겐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있어서 다른 이의 아픔과 상처를 더 잘 이해하는 감성과 공감력을 지닐 수 있었고 그것이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햇빛 아이든 그림자 아이든 나와의 내면아이와 만나는 것은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하나의 삶의 지표로서 작용한다. 이로써 나는 진정한 천직을 찾고 자기 자신에게 도달해가고 있다.
“싱클레어, 대다수가 가는 길은 편하지만 우리들의 길은 힘든 거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더스토리, 171쪽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더스토리, 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