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먼저 작품을 읽고 오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이생규장전>은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단편이다.
현대의 로맨스 드라마의 원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은 단편이지만 이 소설은 로맨스의 극치를 보여준다. 두 남녀 주인공 이생과 최랑은 편지와 시문을 통해 서로의 연정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한 차례, 부모의 반대로 멀리 떨어지게 되고, 최랑은 상사병에 걸린다. 이를 보다 못한 최랑의 부모가 혼사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이생의 부모를 설득하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도 잠시, 홍건적이 쳐들어온다. 이생은 무사히 도망쳤지만 최랑은 정조를 잃을 위기에 처해 도적 앞에서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생 앞에 최랑은 귀신이 되어 나타나고 둘은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 때가 되어 결국 최랑은 자신은 떠나야 하는 몸임을 밝히고 이승을 떠나고 최랑이 사라진 후, 이생도 시름시름 앓다 생을 마감한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 주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이 소설을 보면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떠올렸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편과 아들을 보러 장마철이 되면 돌아온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는 차무혁이 죽자 송은채도 그의 무덤에서 독약을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중에 이런 사랑스러운 소설이 있었다는 것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죽음조차 헤어지게 하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공통된 정서가 마음을 울렸다. 특히 이생과 최랑은 사회적 기준보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선택했고, 그 진심이 결국 생사를 넘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랑마저 비교와 조건 속에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생규장전>은 우리에게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진짜 사랑이며, 시대를 넘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이 고전은 조용히 우리들에게 속삭인다.
요즘 세상은 계층이 촘촘히 위계로 나뉘어있어서 비교하는 문화가 만연하다. 배우자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반려자가 아니라, 다른 친구나 동료에 비해서 자신의 배우자가 얼마나 사회적 지위나 집안, 학벌 등으로 누가 더 낫나를 따지며 점수를 매기려고 한다. 그러면서 남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다고 느끼면 손해 봤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하다며 한탄한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체하지만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가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생의 부모도 처음엔 최랑을 반대했다. 이생은 곧 과거에 급제해 높은 지위에 오를 예정인데 최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콧대가 높았지만, 다 죽어가는 최랑을 위해 최랑의 부모는 많은 재물과 지참금으로 이생의 부모를 설득해 혼인시켰다. 양가 부모 간의 조율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둘의 결혼에는 결정적으로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죽어서 혼령이 되어서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둘은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사랑이란 0.3초 만에 결정된다고 하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강렬한 끌림이라면, 사랑을 지속하는 힘은 매력이다. 이생의 높은 학식과 아름다운 용모, 지혜, 최랑의 미모와 용기, 수놓기와 바느질, 시서에 능한 점 등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강렬하게 만들어줬다. 요즘은 가짜사랑이 만연한 시대라고 하지만, 이생과 최랑처럼 서로를 진심으로 열렬히 사랑한다면, 홍건적이 침입해 오는 비극 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어떤 최악의 조건에서도 그 사람에게로 향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죽음도 가르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아무리 한 많은 삶을 살아도 삶의 끝에 후회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생과 최랑의 사랑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조건과 비교 속에서 평가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마음인가.
<이생규장전>은 그 답을 오래전부터 조용히 들려주고 있었다.
https://youtu.be/PMyIlWYNRlw?si=1i04T-SxcGZORc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