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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Aug 11. 2019

행복이란 저축과 같은 것

스물세 살, 재수생 시절에 기어 올린 행복

지난 글 <행복은 비교하지 않는 것>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https://brunch.co.kr/@lizzie0220/29




행복이란 저축과 같은 것


 2009년은 저에게 혹독한 한편,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준 한 해 이기도 했습니다. 2009년 1월 말, 임용고시 최종 불합격을 확인하고 컴퓨터 모니터를 그대로 놔둔 채 함께 결과를 확인하러 온 친구를 옆에 두고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 멍하니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학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가군에 지원한 학교에 불합격했지만 일주일 후 나군에 지원한 학교에 합격하여 05학번으로 교대 입학) 절망스러웠습니다. 50%의 임용고시 합격률을 보고 왜 나는 그 50% 안에 들 수 없었을까 좌절했고 친구들의 ‘인생에서 실패를 맛볼 때도 있는 거야’란 말이 전혀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냥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터, 기운을 차리고 기간제 교사 자리를 알아보고 3월부터 7월 말까지 00 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으로 근무했습니다. 기간제 근무 기간 동안에는 전혀 임용고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7월 말 기간제 근무를 마치고 8월 초부터 바로 노량진으로 들어가 스터디원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박차를 가한 임용 공부. 이때 8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가 저에게는 인생 사상 가장 치열하게 산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씻고 준비를 한 후 노량진 강남교회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7시 조금 지난 시간. 다시 독서실로 가면 7시 30분. 그때부터 타이머를 켜고 단 몇 분의 낭비도 없이 풀타임 13시간을 내리 공부만 했습니다. 잠자는 시간 7시간, 밥 먹는 시간 3시간, 씻는 시간 1시간을 빼고 오로지 공부만 한 것입니다. 아무리 재수생이라지만 1월, 2월부터 공부한 학생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진다는 불안감, 초조감이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원도 다녔지만 저와 스타일이 맞지 않아 중도에 그만두고 환불받아 오로지 독학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렇게 3달을 공부하고 처음 치른 1차 시험, 교육학 문제 10개 틀리고, 교육과정 문제 5개를 틀렸어요. 교육학이 30%, 교육과정이 70% 반영이었기 때문에 전혀 불리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1달 동안 2차 시험 준비. 2차 시험 결과도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차 시험까지. 2박 3일 동안 치르는 3차 시험에서 뽑기 운도 꽤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3일 동안 5번, 7번, 2번이라는 앞 번호만 뽑아서 제 시험에 운을 더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최종 합격!!!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모든 고생이 끝나나 싶었습니다.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과정이 항상 행복하기만,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간제 때 번 돈으로 고시원에서 쓸 예쁜 이불을 주문해서 세탁기로 빨고 고시원 옥상에 뽀송뽀송 말리던 순간, 그 옥상에서 바라본 한강 너머로 지나가는 기차의 낭만, 스터디 언니와 함께 맛집을 찾아 돌아다닌 일, 사육신 공원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 헤맨 일. 그 순간순간이 제겐 행복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두운 시기에도 밝은 면을 찾아 헤맨 값진 순간이랄까요? 한편 전국 초등교사 채용 티오가 발표된 날, 전년도의 반토막 난 인원에 스터디 언니 앞에서 불안하다며 눈물을 훌쩍이던 순간도 있었고(창밖은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스터디 언니가 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시자고 했지만 하루 13시간 공부 시간을 지키기 위해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일까지도. 이렇게 조각조각 불안과 슬픔을 맛보아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 긴 임용고사 준비 기간 동안 또 한 가지 제게 강렬한 행복의 순간으로 남아있는 것은 난생처음 좋아하던 작가를 만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경험도 쌓이고 나이도 있다 보니깐 좋아하는 작가를 많이도 만났는데요. 이 때는 제 생애 처음이었습니다.      

<꾸뻬씨의 행복여행> 책 첫장에 프랑수아 를로르의 사인을 받다
프랑수아 를로르의 모습

 바로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쓴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를로르를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일이었습니다. 카페에서 통역사를 통해 작가분의 이야기를 듣고 한 공간에서 책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책에 받았던 사인. 이 모든 게 저에게는 잊지 못할 행복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치열하게 살던 시기라 더 그랬던 걸까요? 그 후에도 여러 작가 등을 만나봤지만 이때만큼 기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차곡차곡 저축하는 일 같아요. 바삐 돌아가는 삶 속에서 건져 올리는 자그마한 선물. 노량진에서 먹었던 컵밥, 사육신 공원에서 바라본 한강, 스터디 언니와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순간들이 저에게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리고 프랑수아 를로르를 만난 일까지... 시간이 지나면 훗날에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또한 행복한 기억으로 저장되겠죠.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고 해요. 제가 죽기 전에는 어떠한 일들이 행복한 순간으로 펼쳐질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죽기 직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잘 살았다고 만족하기 위해서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행복을 저축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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