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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Jan 20. 2023

좋게 말하면 안 듣는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보며

 장애인 시위에 대한 기사 댓글이 비난과 악플 일색이다. 그것을 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이 처음부터 저렇게 시위를 했었나? 처음에는 그들도 평화적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운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듣는 시늉도 안 한다. 또 개가 짖네라며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게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흘려버리기만 하면 다행이다.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며 또 다른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험담을 부풀린다.


 이건 내가 경험해서 아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더더욱 약자의 입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무려, 스무 살 때부터 대학 동기들에 의해 왕따를 당했다. 예비교사들로부터 말이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는 계속되는 따돌림과 고립됨 속에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이상하게 과장되어 나를 완전히 쓰레기년으로 매도해 버려 폭력과 폭언과 괴롭힘이 이따랐다. 나는 이에 대해 정말 간곡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방관자 동기,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너희 친했잖아?" "너 소설가야? 왜 거짓말해?" "왜 이야기를 꾸며?" 아니면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며 무언의 입 닥쳐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로 인해 번번이 좌절감을 느껴야 했고,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고립감과 외로움, 절망감에 피눈물을 가슴으로 쏟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한 방관자들은 초기 가해자들과 한 목소리가 되어, 자기들을 매도했다며, 또다시 나를 욕하고 있다. 내가 타지에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서러움과 슬픔에는 어떤 일말의 공감조차 해준 적 없으면서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교육 현장에 있으면 알겠지만, 선생님들은 겉으로는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왕따가 발생하면 피해자를 도와주는 것처럼,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시늉'만 한다. 시늉이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다수는 피해학생을 골칫덩어리,  VVIP,   금쪽이, 문제아로 몰아간다. 그 상황에서 학생의 편에 서서 귀 기울여주고 도움을 주고자 애쓰면, 소위 '나대는', '성인군자'인 척하는 이상한 교사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학교폭력 예방에 기여한 한 교사가 왕따를 도와주다가 자기가 교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인터뷰 기사도 보았다.


 그런 학교 교육 병폐의 연장선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닐까 싶다. 학교로부터도 소외된 약자들은 승진점수받는 목적이 아니라면 귀찮은 존재, 신규 교사 또는 만만한 교사에게 떠넘겨지는 존재인데, 사회에 나온다고 다를 게 없지 않나. 체제에 순응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기 위해 군말 없이 차별과 억압과 폭력을 견뎌낸다면, 차라리 몸싸움을 해서라도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정신적 상처와 후유증이 더 크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닐까?


 살인도 연쇄살인범의 끔찍하고 인간성을 기만한 살인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처럼 영웅적인 행위도 있다. 장애인이 설 연휴 귀성길을 방해한다고 한 목소리로 끔찍한 저주를 퍼붓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나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는 얼마만큼 장애인의 처지에 아파하고 그들을 배려하고 있을까? 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가난한 노동자든 힘없는 사회적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무시당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때, 더 이상 시위가 아닌 진정한 평화적인 대화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쪽의 일방적인 순응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또다시 폭력으로 찍어 누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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