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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비 Mar 23. 2024

트라우마 치료하기

베센 발 데어 콜크의 <트라우마>


EBS 《위대한 수업》에서 베센 발 데어 콜크의 정신건강 특집 <트라우마>1강을 보았다. 트라우마를 겪은 환자의 뇌는 위험을 감지하는 경보장치와 같다고 한다. 바로 내 뇌가 그런 상태인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꾸준한 치료로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면 경보음이 울리는 건 마찬가지다. 잠시 응급처치를 해도 다친 부위에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것처럼 쓰라리고 아프다. 하지만 결국 상처 부위에도 새살이 돋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흉터가 옅어지듯이 내 마음에 남은 트라우마도 옅어지리라 믿는다.


나는 직장에서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철 모르던 초년생 때는 미주알고주알 경계하지 않고 다 떠들곤 했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내 사적인 부분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교묘하게 이용하고 뒤통수 치는 방안으로 삼는 걸 겪고 나서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었던지를 깨달았다. 세상은 따뜻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정글의 세계였다.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에는 “언제나 선하려고 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다”라고 쓰여있다. 선하다는 것도 그것이 통용되는 세계에서만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인간세계도 약육강식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서 나를 감추고 경계태세가 발동하지만 글을 쓸 때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현실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는 말도 글을 쓰는 공간에서는 조금 더 툭 터놓게 된다. 글쓰기를 핑계로 조금은 더 나를 오픈하게 된다. 쑥스러운 고백서 같은 느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조차도 누군가를 밟고 올라설 절호의 찬스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또는 손쉽게 구독 해지나 차단 버튼을 누를 간편한 손절의 기회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공명하는,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지 의식을 싹트게도 한다. 차가운 온라인 세상에서도 따뜻한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연대의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조금은 냉정하게 그래봐야 온라인 관계이고 오프라인으로는 절대 이어질 수 없는 관계다. 결국에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건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얼마나 밀도 높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결국 사람에게서 치유받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이 차가운 현실에서 어쩌면 대단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대다수는 가짜 관계에 매몰되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다른 사람이 가짜 인생을 살고 있다고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싶어 하는 게 요즘 사람들이니깐. 맑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스럽고 순해 빠진 멍텅구리라고 욕하고 싶은 게 요즘의 영악한 사람들이니깐.     


오늘 한 뉴스 기사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고 출산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헤드라인을 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원인 분석이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적인 흐름도 아니고 개인적, 문화적 요인도 아니고 ‘한국적'인 ‘사회적’, ‘경제적’인 요인이 원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좋은 학벌과 일류직장을 차지하기 위한 초경쟁사회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패배감을 심어주었고 자연스럽게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의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대학 진학률을 가진 나라의 부작용이 씁쓸하기만 하다.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 속 이야기처럼 서로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결국 아름답게 날아오르는 노랑 애벌레처럼 지옥 같은 경쟁사회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지키며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결국 사회에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트라우마는 나만의 것이면서도 또한 한국적인 것이니깐….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깐….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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