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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니 Oct 08. 2024

죽음과 신에 대한 철학적 고찰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인데, 그 중심에는 항상 죽음이라는 주제가 함께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같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기에,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곧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으며, 삶과 죽음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작용 속에 있는 개념이다

죽음은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 몽테뉴는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죽음이 인간의 지혜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임을 언급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연습이다"라는 표현으로,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중요한 주제다.

박진영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방송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인생에서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이라는 문제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열심히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는 교훈을 배우지만,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인생이라는 길에서 시작과 끝을 모르면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의 깊이를 더했다. 즉, 인생에서 시작과 끝, 우리의 출생과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혼자만 품고 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다. 그 결과 그는 《무엇을 위해 살죠?》라는 책을 출간하여, 자신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담아냈다.

철학과 종교에서는 죽음과 괸련해서 사후세계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도 오랫동안 이어왔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논의는 여러 문화를 배경으로 신의 존재와 죽음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아이디어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물음으로 연결된다. 반면,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죽음 이후의 운명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이와 달리 불교는 윤회를 통해 생명은 죽음 이후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며, 이러한 순환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궁극적인 해탈을 얻는다고 본다.

평행세계나 시뮬레이션 이론은 현대 과학과 철학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등장하는 이론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이 단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이거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이론들은 사후세계를 포함한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설명하려는 시도로, 인간의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신에 대한 정의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을 창조하고 절대적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반면,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와 같은 다양한 신들이 우주와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도교에서는 신이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기보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도'의 개념을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반면, 인도의 힌두교는 다신교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다양한 신들이 각기 다른 역할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신이 우주와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파괴하는 책임을 진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신의 역할을 점점 축소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과학적 탐구는 만물의 원리를 규명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설명이 가능하게 되면서, 신의 개념이 과거보다 덜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철학적, 종교적 담론에서 중요한 주제다. 과학이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확장되었어도, 우주와 생명의 근원, 그리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신의 존재 여부와 관련된 논의로 이어지곤 한다.

축의 시대(기원전 800년~기원전 200년)에 활동했던 여러 철학자들은 신을 단순히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삶, 도덕,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신을 재해석하거나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의 상키아 철학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이 아닌 물질(프라크리티)과 정신(푸루샤)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상키아 철학은 우주가 물질과 정신의 원초적 원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작동한다고 보았으며, 초월적인 신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상키아 철학이 강조하는 무신론적 관점은 축의 시대의 다른 사상들과도 연결된다. 당시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신의 존재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내적 탐구와 성찰을 중시했고 상키아 철학은 인간 문제의 근본 원인인 에고를 극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붓다 역시 신보다는 개인의 깨달음을 통해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는 하늘의 뜻을 인정했지만, 인간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적 질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노자 또한 인위적인 신의 개입보다는 자연의 흐름에 맡기고, 인간이 스스로 도(道)를 따르며 조화를 이루는 삶을 중시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신과 이데아에 대한 사유를 담은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물질 세계와는 별개로 완전하고 영원한 이데아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이데아는 본질적 진리로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물질적 세계는 그 진리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서양 철학에 깊이 자리 잡았으며, 이분법적 사고는 서양의 정치, 종교, 철학, 그리고 심지어 경제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은 서양의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건설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서양은 자신을 '문명화된 선'으로 규정하고, 자신과 다른 문화, 특히 동양과 아프리카의 문화를 '미개한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서양의 과학적, 기술적,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반 위에서 정당화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명목 하에, 비서구 세계를 정복하고 통제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동양의 가치관, 철학, 종교는 서양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과 대립되는 '이질적인' 것으로 묘사되었고, 서양은 이를 교화시키고 개선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자신들의 신앙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이로 인해 다른 신앙 체계나 문화를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이나 이슬람의 확장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적 갈등이 두드러졌다. 서구 기독교 세력은 이교도들을 "악"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교화시키거나 정복하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슬람교도들 또한 자신들의 종교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성전(지하드)을 도덕적 임무로 여겼다. 이러한 신과 인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은 결국 수세기 동안 종교적 대립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때로는 정치적 이념과 결합해 극단적인 전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반면, 동양 철학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매우 중시하며, 이는 무신론적 또는 다신론적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와 협상을 통한 균형 유지가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이를 대표하는 전쟁사에서 유명한 손자병법은 "최고의 전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대립을 넘어서 심리적, 전략적 균형을 중시했다. 동양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음양(陰陽) 사상에서도 대립하는 두 개념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세계가 유지된다는 생각이 강조된다. 이러한 철학적 기초는 협력을 통한 균형과 평화 추구를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원론적 사고는 서양 사회 내에서 경쟁과 혁신을 촉진하고, 빠른 과학적·기술적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고 분석할 대상으로 보며, 이를 통해 산업 혁명과 과학적 발전을 촉진했다. 자연을 분리된 대상으로 인식한 덕분에 서양 사회는 자연 자원과 기술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고,
세계적으로 경제와 기술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서양식 발전 모델은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기 시작했다. 이원론적 사고가 인간과 자연을 대립 구도로 보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발전 방식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서양 철학의 우세가 흔들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며,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도교와 유교 등 동양의 사상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고 보며,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겸손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이원론적 세계관에 따라 전해 내려오는 성경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가 사도들을 통해 전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기록한 문헌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문헌들은 구전된 내용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일어난 수정이나 추가 사항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성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복음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텍스트로, 기적과 신비로운 사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에서는 복음서가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나중에 문서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본래 사건에서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논의된다. 더구나 도마복음과 같은 외경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경들은 신학적, 역사적 신빙성 면에서 논란이 많으며, 복음서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예수는 본래 유대교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는 견해는 학계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다. 그의 가르침은 유대교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유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며 사람들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당시 예수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유대교의 예언자적 전통을 따르며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원의 핵심으로 강조하며, 예수를 신성한 존재로 추앙하는 새로운 신앙 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리되었고, 예수는 단순한 예언자에서 신적 구원자의 위치로 상승하게 되었다.

결국 성경과 같은 고대 문헌들은 역사적 기록이면서 동시에 신앙적 해석이 결합된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축의 시대 철학자들, 예를 들어 붓다,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등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이성적 사고와 자기 성찰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축의 시대의 철학에서 보이는 무신론적 성향과 예수의 의도와는 달리 형성된 기독교는 모두 인간의 내적 탐구와 자아 해방에 중점을 두는 철학적, 종교적 흐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생각할 때, 우주의 광대함과 그 복잡성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만큼 거대하고 경이롭다.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매우 미미하다는 인식은 신이 인간과 같은 작은 존재들에게도 신경을 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통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많은 종교는 신이 우주만큼 거대하고 초월적인 동시에, 인간과 같은 작은 존재들에게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신이 우주를 창조한 동시에 인간의 개인적인 삶에도 깊이 관여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태복음 10:30)라는 구절은 신의 섬세한 돌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신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는 "신정론"이나 "신의 속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만약 신이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모든 존재와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같은 작고 미미한 존재들이 우주의 큰 그림 속에서 어떻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일부 무신론적 관점이나 불가지론적 시각에서는, 신이 모든 것을 돌보는 존재라기보다는 우주를 설정하고 그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존재로 본다. 또 다른 철학적 관점에서는, 우주의 복잡성과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신의 계획 중 일부일 수 있으며, 그 계획의 규모와 복잡성 속에서도 인간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만약 신이 인간에게 신경을 쓴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우주 속에서 작고 미미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감정을 지닌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각하고, 고뇌하고, 창조하며,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능력이 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원리는 신을 하나의 관찰자로 비유할 수 있다. 이를 신의 역할과 결부시킨다면, 신이 우주를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관찰함으로써 우주와 인간에게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관찰 행위만으로도 물질의 상태가 변할 수 있는 양자역학적 원리처럼, 신의 존재와 그 관찰이 우주의 흐름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를 인간과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우주를 창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 자체가 신의 한 부분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인간이 창조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세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면, 인간이 곧 신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경우, 신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적 에너지 그 자체로 표현되며, 인간은 그 안에서 신성의 일부를 경험하는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더 나아가 인간이 우주의 일부로서 신을 체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신이 인간을 "특별히 돌보지 않는다"는 개념도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인간이 자신의 몸 속 세포들을 신경 쓰지 않듯, 신도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 속에서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를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돌보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도로만 설명될 수 없는, 더 복합적인 상호작용일 수 있다. 인간의 의식과 창조적 행위가 신의 일부이자 표현이라면, 우리는 곧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일부로서 신성의 속성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현생누대에 이르러 지구는 5번의 대멸종을 겪었고, 신생대에 들어서야 약 4만 년 전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여러 인간종 중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의식 있는 인간까지의 진화 과정을 설명할 때, 인간 중심적 관점과 화학적 진화론으로도 여전히 인간의 탄생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이라는 창조자를 상상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 인더스, 황하까지,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 베다, 도덕경, 논어, 유가, 법가, 불교, 구약, 신약 등 다양한 문화와 시대에서 등장한 다양한 신들이 단지 각기 다른 환경과 시대 속에서 탄생한 해석과 신념의 산물인 것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신의 존재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관념적 산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신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신이 보이지 않고, 그 존재를 명확히 알 수 없다면, 결국 우리의 삶과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과 세계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많은 철학자와 현자들이 내면을 통한 진리를 강조해왔고, 이 과정에서 발견된 일원론적 관점은 나와 세계가 결국 하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만든다.

일원론적 사상을 가진 사상가들은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사상을 강조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에서 인간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설파했다. 이러한 통찰은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방식과는 대조된다. 이원론적 관점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선과 악, 좋고 나쁨으로 나누게 되고, 이러한 구분은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다.

만약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외부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된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의식이 단순히 사고나 감정의 흐름을 넘어서서, 세상과 깊이 연결된 무한한 에너지를 지닌 존재로 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관점에서 신은 외부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에너지이자,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고 연결되는 통로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동양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원론적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며,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우리 내면의 의식이 무한한 에너지를 지닌 존재라는 생각은 현대 과학에서도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양자역학에서 의식이 현실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은 신이 인간 내면의 에너지일 수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다.

신앙을 갖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신앙을 강요하거나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한국 사회는 관계주의 문화속에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문화 때문에, 종종 신앙이 강요되거나 과도하게 집착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보다는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이 중심이 되면, 자신을 잃거나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어렵게 된다.

한국에서 신앙을 둘러싼 갈등은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의 차이로 인해 불화가 생기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독자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은 그로 인해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신의 존재 증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이 설명되거나 입증된다고 해서, 그것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단순히 인간의 뇌가 갖는 특별한 능력일 수도 있고, 우주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수도 있다.

결국,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과학적 증명보다는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적으로도 신앙은 개인적 구원과 위안을 제공하는 동시에, 때로는 갈등과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종교 전쟁이나 종교적 갈등은 신앙이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되고 맹목적으로 추구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준다.

따라서 신앙은 개인적인 선택으로 남아야 하며, 그것이 중심이 아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신앙은 개인이 스스로 깊이 성찰하고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어쩌면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든 것은 아닐까? 삶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 죽음이라는 진실은 실로 궁극적인 역설이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 죽음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우쳐 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해준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물질적 소유나 사회적 성공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다. 결국, 삶의 본질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이러한 근본적인 깨달음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어쩌면 죽음이 진정한 주인이고, 삶은 그 주인이 잠시 허락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은 마치 집주인처럼, 우리는 그저 일시적으로 머무는 세입자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죽음과의 관계를 두려움 속에서 맺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매일매일을 귀중한 경험으로 바라보고, 삶의 희귀함과 소중함을 깨닫도록 만들어준 죽음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더욱 값지고 의미를 가진다. 죽음은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강력한 교훈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몰두하지만, 나는 오히려 "어떻게 죽어야 행복할까?"라는 질문이 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본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삶의 끝을 상기시켜 주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만약 지금 당장 죽음이 닥친다고 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되지 않으며,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우리라면 삶에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며 더욱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을 앞두고 무엇이 가장 후회되는지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며, 지금 당장 그 후회를 없앨 수 있는 실천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삶은 종종 죽음의 존재를 잊게 만들지만, 죽음은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중요한 요소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명대사 "살아만 있다면 뭐든 별거 아니야"는 그런 맥락에서 죽음이 삶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고, 삶을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더 감사할 수 있으며 더 행복한 삶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다. 죽음을 피하려 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을 자주 상기하며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꿔준다.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더욱 깊이 음미하고,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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