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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과경계 Jul 10. 2024

비판적 읽기로 인식의 지평 넓히기

  비판적 읽기를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읽기 방법은 두 글을 비교/ 대조 혹은 연계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다.  아래  두 글을 읽고 비교/대조하거나 연결의 지점을 찾아보자.       


<1>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in-group)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그만큼 외집단(out-group)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된다. 심지어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외집단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는 심리 연구도 있다. 피험자들에게 미국에서 벌어진 아동 학대 사건과 중동에서 벌어진 저널리스트 납치 사건에 대해 읽게 했다. 그런 다음 어떻게 대응하는 게 가장 좋을지를 물었다. 가령 납치 사건의 경우 무대응 원칙부터 공개적 비판 성명 공개, 그리고 무력 보복까지 여러 정치적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런 후 공감척도를 활용해 피험자들의 공감능력을 검사했다. 실험 결과는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가해자에 대해 더 가혹한 처벌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공감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에 대한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옥시토신 수치가 높을수록 우리 편에 대한 충성심은 높아지지만 상대편에 대한 공감은 오히려 낮아진다.     

  이렇게 공감의 깊이와 반경은 상충한다. 미국 남부 흑인들이 경험했던 혐오, 차별, 폭력이나 유럽의 홀로코스트 잔학 행위들은 단순히 가해자의 공감 결핍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 가해자들은 흑인 남성에게 강간당한 백인 여성이나 유태인 소아성애자에게 착취당한 독일 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에 극도로 공감한 이들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거룩한 학살을 자행했던 십자군이나 최근 이슬람 테러조직의 문제는 공감 결핍이 아니라 자기 집단에 대한 공감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 제주 4·3 사건 등의 한국 근현대사도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이 만들어낸 질곡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하 생략.     

                                              장대익, 「공감은 언제 폭력이 되는가?」, 『경향신문』, 2020.12.15.     


<2>     


   혐오는 강력하고 뿌리 뽑기 어려운 감정이다. 우리 뇌는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뇌의 기능 대부분은 수렵채집민의 환경에 맞춰 진화했다. 외집단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내집단 사람들과 연대하고 결속하는 능력은 수렵채집민에게 유용했다. 배척과 결속의 두 기능을 우리 뇌가 비슷한 회로로 처리한다는 연구는 의미심장하다. 혐오는 혐오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결속감과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혐오가 그토록 뿌리 깊은 본능적 감정이라면,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선택지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20세기 영국의 존경받는 판사였던 패트릭 데블린은 “모든 사회는 자신을 보존할 권리를 지니며, 공동체 구성원의 혐오에 맞춰 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혐오의 본원적 기능인 ‘오염에 대한 공포’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 공포를 인정해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누스바움은 반대편에 서 있다. 자유주의 사회란 ‘평등한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기본 원리로 채택한 사회다. 자유의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혐오는 특정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낙인찍는 감정, 사실상 그 목적으로 설계된 감정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회는 혐오라는 감정을 관리하고 연구할 의무를 갖게 된다. 그래야만 ‘보편의 원’을 더 크게 그려나가서, 그 원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도록 계속해서 넓힐 수 있다. 누스바움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인간 본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인류 전체를 ‘내집단’으로 포괄하는 세상을 꿈꾼다. 흑인 민권 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흑인의 특별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길로 가지 않았다. 그는 보편적 인권의 원을 확장하여 모든 인간이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쳤다. “세상에는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혐오의 진정한 해악은 우리를 보편에서 벗어나 파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천관율, 「2020년의 첫 질문 혐오란 무엇인가」, 『시사인』 649, 2020.02.17.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것은 원시 헬스케어시스템으로서의 원초적 혐오에서 출발한다. 이 원초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투사되는 과정을 통해 특정 집단, 사람, 인종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 폭력이 발생한다.  장대익의 글은 공감에 관해 말하지만, 과잉 공감이 차별과 폭력을 낳는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공감이 혐오와 연계된다는 점을 환기한다. 천관율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편도체와 전두엽의 동시적 작동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점, 혐오의 특수성에 관해 한다.    


  공감과 혐오는 생존을 위한 호모사피엔스의 생물학적 반응에서 출발하였고 그것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순기능과 역기능을 수행해 왔다는 점을 연계할 수 있다. 이 역설적 관계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비판적 읽기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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