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자란 노래문화
기록으로 전하는 여성민요(2)
현재 기록으로 남은 민요는 삼국유사나 익재소악부, 조선왕조실록 혹은 개인문집을 통해서입니다. 기록으로 남지 않고 유실된 민요는 많습니다. 그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 고려의 노래가 전하지 않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노래명만 전하는 백제의 노래 가운데 <방등산>이란 노래는 그 사연이 전합니다. 나루 속현 방등산의 장일현에 사는 여성이 도둑에 붙잡혔습니다. 자신을 남편이 구하려 오지지 않은 것을 풍자한 노래라고 전합니다. 그런 점에서 <방등산>은 <지리산>이나 <정읍>과는 다른 정서의 노래라고 보입니다.
조동일 선생님은 이 노래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노래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성기옥 선생님은 백제적인 노래형식과 선율적 전통 위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민요라고 했습니다. 피폐한 민중들이 흩어지면서 도적의 무리가 되어 양민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사회적인 혼란을 가중시킨 사회적인 배경을 보여주는 노래라고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적 혼란과 약탈의 상황에서 언제나 여성은 큰 피해자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주목할 만한 자료는 <산유화가>입니다. <산유화>를 백제의 노동요라고 한 임동권 선생님은 이 노래가 백제의 노래지만 현재 영남일대에 불려지는 노래라고 보았습니다. ‘산유화, 산유해, 미나리, 매나리꽃’ 등으로 불리는 점이 그러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백제노래라는 <산유화가>는 조선 후기 한시로 쓰였습니다. 다양한 산유화 자료가 있습니다. 백제에서 조선시대, 근래에 이르기까지 민요의 통역사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유화>에 대한 선학들의 견해를 정리하자면 이 노래는 모내기에서 불렸고 나물 캐는 노래로도 불렸으며 어사용으로 채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메나리 토리의 선율이 담긴 노래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입니다. 노랫말은 탄식과 서글픔을 담았을 것입니다.
신라의 노래인 <풍요>는 여성민요는 아니지만 여성과 남성이 같이 부른 노동요의 원초적인 형태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방아노래로 불렸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회소곡> 역시 이 시기 남아있는 중요한 여성민요입니다. <풍요>나 <회소곡>은 당시 불려진 여성 노동요의 존재 양상을 추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풍요>처럼 노동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민요가 남녀 구분 없이 불린 동시에 <회소곡>처럼 서글픔의 자탄의 노래가 여성들 사이에서만 불려졌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생활의 일부로 자리한 노동요는 그대로 전승되거나 혹은 새로운 노랫말을 더해가면서 다양화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층으로 유입되기도 했습니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악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궁중으로 유입되었던 겁니다.
<천수대비가>도 시기의 대표적인 여성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명 도천수대비가라고 불리는 이 노래는 신라 35대 경덕왕대 한가리녀 희명의 아이가 5살에 실명하여 그 어머니가 관음벽화 앞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임동권 선생님은 이 노래가 순수한 민요는 아니지만 신앙적인 기능을 가진 민요로 원시 민요의 주술성이 불교에 습합된 민요라고 보았습니다.
두 무릎을 고초으며
두 손 모아서
천수관음앞에 비옵니다
일천수 일천목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겠사오면
둘도 없는 내오니
하나는 그윽이 고쳐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십시사
놓아 주실진대 자비여 크소이다.
정동화 선생님은 이 노래가 반복어, 감탄사 쓰임이 소박하고, 민간신앙적인 주술성을 담고 있으며 아들에게 노래지어 기도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 노래가 민요의 모방적인 작품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동일 선생님은 이 노래가 민요가 아닌 사뇌가의 변형이라고도 했지만 고정옥 선생님이나 임동권 선생님 등은 이 노래를 광의 민요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성기옥 선생님도 이 노래는 민요적인 사역의 노래로 여성 집단의 정서적인 욕망을 표출해 내는 노래라고 했습니다.
<천수대비가>는 노동적 기능을 가진 노래는 아니지만 이미 노동요를 통해 다양한 방식의 노래 부르기가 익숙해진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서적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성 노래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치술령곡>과 같은 노래는 19대 눌지왕 때 내물왕자가 일본 인질로 가있을 때 박제상이 이를 풀어주기 위해 일본에 가게 되자 그의 아내가 삼랑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부른 노래라고 전합니다. 양주동 선생님은 이 노래가 박제상과 그 처의 비탄을 국민이 애상한 민요라고 했습니다. 정동화 선생님도 이를 <정읍사사>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만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목주가> 역시 신라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요, 임동권 선생님은 현존하는 계모노래와 이를 연결시켜 언급하였고, 정동화 선생님은 <사모곡>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민요라고 했답니다.
이외에 자비왕 때 백결선생이 지었다는 <아악>은 당시 유행하던 방아타령을 맞추어 거문고를 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근래의 방아타령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데, 앞에서 본 <풍요>와 관련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노래 말고도 원화가 친구를 질투하여 술을 먹이고 죽인 사건을 노래한 <원화가>라든가, 김유신이 가까이한 천관녀가 김유신을 원망하여 불렀다는 <천관녀>의 노래도 이 시기에 불린 노래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성기옥 선생님은 이 노래를 7세기 기녀류의 하층신분의 여성이 창작한 노래로 보았습니다. 당시 여성들이 노래를 자연스럽게 지어 불렀을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본 셈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노동요라기보다는 당시에 유행하던 유희적 노래 혹은 상층으로 수용된 연희적 성격의 노래라고 보이긴 합니다. 다만 노래의 배경이라든가 그 내용을 통해 당시에 불렸을 여성 민요의 노랫말이 얼마나 다양했을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