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역사적 흐름에 따른 여성민요의 흔적과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서 '향랑'이라는 여성의 사연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선산의 여자 그 이름 향랑인데
농가에서 자랐으되
품성이 단정하고 고왔어라
어려서부터 장난이 적고 늘 혼자 노닐며
사내애들하곤 어울리지 않더라네
향랑은 어머닐 일찍 여의고
계모 성질 우악하여
매질하고 포악하게 굴어도 공손히 낯빛조차 달라지지 않고
물레질, 나물 캐기 일손이 떠날 새 없었네
향랑 나이 열일곱에
임 씨 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신랑은 열 네 살에 성질도 불량하고
게다가 미욱해서 예의도 전혀 몰라
신부의 머리채 쳐들고 몸을 쥐어뜯고
옷자락 찢기 일쑤더라네
어려서 철이 덜나 그러려니 여겼으나
나이 들어 갈수록 행패는 더욱 심해져서
향랑을 증오하며 매가 손에서 떠나지 않고
범처럼 날뛰는 걸 누가 감히 말리겠나?
.. 중략...
향랑이 대답하길
“그 말씀 온당치 않습니다.
저는 단지 외삼촌께 의탁하고자 하올뿐
여자 한번 혼인함에
두 지아비 섬길 수 있나요
... 중략...
구슬 같은 눈문 비 오듯 떨어진다
시아버님 나를 자식으로 보지 않고
지아비 나를 아내로 여기지 않고
공연히 시집이라 다시 찾아왔다가
시부모님께 미움만 샀도다
이하생략
이광정의 <향랑요>입니다. 향랑은 상형곡 양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모를 만났으나 큰 미음을 받았습니다. 혼인하여 임칠봉의 아내가 되었지만 여전히 홀대받고 매질만 당했답니다. 향랑을 딱하게 여긴 외숙과 시아버지는 개가할 것을 권하였지만, 향랑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지주비 아래 이르러 다래와 치마를 풀어 나무하는 소년에게 맡기며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고 나의 죽음을 증언하여 시체를 찾게 해 달라"라고 말했답니다. 향랑은 이어 산유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후 물에 빠져 자결했다고 합니다.
향랑 사건은 조선 숙종 28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전승되어 향랑이 불렀던 산유화는 민요로 유포되었습니다. 향랑의 사연은 문인들의 문학적 소재로 채택되어 시와 전 장편 소설로 창작되었습니다. 향랑의 이야기는 선산부사 조귀상이 향랑을 전을 지어 현지 약정의 보고 문서로 옮겼다고 하는데 소개한 시는 문서의 사실과 거의 일치한다고 합니다.
향랑의 정절을 강조한 점은 이를 기록한 유학자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은 유교적 이념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지주 등에서 나무하는 여자애들
산유화 가락 구슬프게 부르는구나
향랑의 얼굴 한번 본 적도 없건만
향랑이 부른 노래 잘도 부르는구나
최성대의 <산유화가>의 앞부분입니다. 나무를 하는 여자애들이 부르는 산유화 가락이 향랑이 부른 노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향랑이 부른 노래는 여성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여성이 모이는 소집단의 노동 현장에서 불려졌던 노래가 가운데 하나가 향랑이 부른 산유화가라는 사실은 여성민요의 전승과정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전쟁과 부역의 생존의 현실에서 불렀던 전 시대의 서정적인 노래들은 강력한 이념 국가를 만나면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여성민요 역시 이러한 변화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과 생각은 다음 연재에서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