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4년 1월 22일(월), 10 : 00 ~ 15 : 30 (5시간 30분)
○ 날씨 : 맑음, 영상 2℃, 풍속 5m/sec
조용필의 노래 덕분인지 암초임에도 오륙도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아는 유명한 섬이다. 선착장에서 북쪽으로는 이기대를 거쳐 해운대로 향하는 해파랑길 1코스이고, 남으로는 오늘 걷고자 하는 남파랑길 1코스의 기점이다. 동해 및 남해안 둘레길의 상징적 장소이랄까. 곶의 형태라 늘 바람이 거세다. 대신 멀리 해운대 달맞이 언덕과 남으로 영도와 부산을 조망할 수 있는 뷰 맛집이다. 난이도가 ‘보통’이지만, 7시간이나 소요된다고 해서 조금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부산역에서 오륙도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는 한산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분주한 모습, 버스 안의 내가 이방인인 듯 마음이 묘했다.
오륙도 선착장. 남파랑길과 해파랑길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선착장 뒤 언덕에는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자가 주는 덧신을 신고 스카이워크 위를 걸었다. 투명한 바닥을 통해 보이는 거친 파도에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스카이워크를 나와 본격적으로 남파랑길 걷기 시작했다. 신선대까지는 4차선 도롯가이다. 통행하는 차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나쁘지는 않았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서 본 오륙도
1시간쯤 뒤, 잘 가꾸어진 UN 기념공원에 도착하여 준비해 온 간식을 따뜻한 차와 함께 먹었다. 이곳에 오면 먼 타지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 영혼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지금도 여전히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전장으로 내몰리는 젊은이들. 더 많은 걸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란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권력자, 종교 지도자를 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유해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붉게 피었다가 봉오리 채 떨어지고 있는 동백꽃이 오늘따라 더 처연하다.
UN 기념공원. 길가의 동백꽃이 지고 있다.
우암동 홈플러스에서 부산진시장까지는 이 코스에서 가장 걷기 힘든 곳이다. 6차선 도로에는 신선대 부두에서 전국 각지로 향하는 컨테이너, 덤프트럭이 줄지어 달린다. 덜컹거리는 소음, 매연 그리고 분진, 그리고 철거를 기다리는 문 닫은 건물들. 빨리 이 길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파트 건축 때문에 우회하는 길이 포함되어 있지만, 왜 이 길이 남파랑길에 포함되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걷다 보니 여기 또한 사람이 사는 길이었다. 둘레길이 사람이 생활하고 걷는 기존의 길을 이어 만든 것이라 보면, 부산을 대표하는 부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문현교차로를 지나 부산진시장 쪽으로 걸었다. 빌딩에 가려 해가 들지 않는데 골바람마저 너무 차가웠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걷다 보니 부산진시장이다. 시장 뒤의 먹자골목에서 점심을 먹을까 했지만, 간식을 먹어서 그런지 시장기가 없다.
부산진시장과 증산공원의 모습이 보인다
좌천동 가구거리 뒷길이다. 남파랑길 다운 정겨운 모습이다. 일신기독병원이 보인다. 딸이 어렸을 때 폐렴으로 1주일 정도 입원했던 곳. 신관을 지어 크게 확장했지만, 주변의 건물들은 거의 예전 그대로이다. 이제부터는 언덕길 오르막이다. 정공단, 부산일신여학교, 부산진교회. 부산포개항문화관. 오래된 건물들과 담벼락에 그려진 역사물을 감상하며 오르다 보면 경사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수직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45도쯤 기울어져 올라가는 모습이 신기하다. 할머니 몇 분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증산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의 좌천 시민아파트. 한때는 부산항을 조망하는 잘 나가는 아파트였을 것이다. 지금은 쇠락하여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 뒷모습마저 쓸쓸했다.
성북전통시장. 웹툰 이바구길로 재탄생했다.
공원을 지나 마을로 내려왔다. 갑자기 전통시장이 나타났다. 성북전통시장이다. 수정동과 범일동을 잇는 고갯길. 한국전쟁 때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형성되었다가 쇠락했던 거리를 웹툰 작가들과 협업하여 웹툰이바구길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관광객이 몇 명 보였지만,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이곳이 20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수정고개부터 금수사까지는 수정산과 구봉산 자락을 걷는 둘레길이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난개발, 그리고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길이다. 중앙대로, 번영로 주변으로 개발된 고층 아파트, 세련미가 있는 부산항 대교와 대비되는 산동네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텃밭은 젊음을 함께하고 자식들을 키워냈을 허름한 집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의 얼굴이다. 벌써 밭고랑을 정리한 것을 보니 다가올 봄을 준비하고 있는가 보다. 건물은 낡았지만, 종일 들어오는 햇살에 사람 살기에는 좋은 곳 같았다.
구봉산자락에서 내려다본 부산항. 길아래 작은 공간마다 텃밭을 만들었다
산복도로를 거쳐 계단 길로 접어들었다.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해 계단 길옆의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고 있었다. 셀 수 없이 까마득한 계단. 과거 이 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서민들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인스타에 사진 잘 나오는 곳으로 소문이 나서 그런지 젊은 연인, 그리고 예쁘게 차려입은 여행객들이 많았다. 외국인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걸 보면 관광 명소인가 보다.
남파랑길 1코스의 끝자락인 초량전통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을 둘러보다가 시락국밥집이 보여 들어갔다. 단돈 삼천 원. 그러나 맛은 만 원짜리 국밥에 못지않았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확 풀렸다. 끈질기게 모진 삶을 견뎌낸 산동네의 어르신들.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허물어가는 집을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시락국밥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