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남자아이에게 연애를 왜 하고 싶냐고 질문 했는데 이런 답변을 들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나는 생각지 못한 답변이라 꽤나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랑 이야기 하는데 불현 듯 그 생각이 떠올라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사랑하는게 좋아? 아니면 사랑받는게 좋아?” 나는 이런 딜레마에 갇히는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고민에 빠진 그 모습을 볼 때 그 희열이란. 어쨌건 이게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삶과 사랑 받는 삶,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 건지가 궁금했다.
“사랑받는게 더 행복할 것 같아.”
친구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몇 개월 전의 나라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가장 뜨겁게, 열렬히 좋아했던 때를 떠올렸다. 우울했던 삶속에서 그 사람을 만나면 즐거웠다. 그 사람이 건네는 말이 너무 웃겼고 재밌었다. 나는 그 사람이 재밌어서 좋았다. 그 사람이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은 나말고도 다른 사람도 알고 있어서 그 사람은 꽤나 인기가 많았다. 나는 그사람을 정말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연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터라, 그 사람을 남자로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와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다. 그냥 우연이라도 어떻게든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고 친하게 지냈으면 하고 바랐다. 용기가 없고 자존감이 낮았던 그때의 나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티나 너무 난 거 겠지.
그 이후로 사람을 열렬히, 그때만큼 좋아해본 적은 없었다. 상처가 된건 아니고 그 사람만큼 재미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후로 사귀었던 사람들은 그냥 뭔가 상황이 맞았고 내가 외로웠던 순간에 같이 있어서 사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엄청 뭔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할 수가 없는 마음 상태였다. 매일같이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나는 삶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사랑했던 경험이 끊겼다가 올해 초에 다시 시작됐다. 물론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글이었다. 글을 쓰는 삶이란 행복했다. 글을 통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재밌었다. 그 경험이 나를 좀 더 밝게 만들어주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랑을 찾고 나니, 사랑을 주는 것과 사랑을 받는 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삶이 더 행복한게 아닐까. 사랑은 받는거라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는 거니깐.
20대 초반의 짝사랑 경험말고는, 나는 사랑하는 것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없어서 너무나 괴로웠었다. 내 삶을 사랑하지도 못했고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한 일 내 몸 그 어느것도 사랑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타인이 나를 사랑해준들 와닿지 않았다.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하려면 내가 적어도 나라는 사람만큼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지금은 나를 사랑하기를 넘어서 나 이외의 무언가를 사랑하는 삶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사랑을 받기 보다는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늘 타인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고, 갈구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삶보다 좀 더 차원 높은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좋아해주고,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뒤돌아 설 수 있는 그런 자유! 그런 자유가 갖고 싶다.
사랑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나는 거침없이 ‘글쓰기’라고 말한다.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일, 그것들이 재밌다. 그리고 내가 토해낸 맞춤법도 잘 맞지 않은 서툰 글이 좋다. 서툴면 서툰 맛이 좋고, 매끄럽게 잘 써내면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어? 하고 감탄하게 된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돌려 받는 일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다 사랑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고통스럽긴 했지만 사랑 할 때가 더 나는 에너지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다. 다시금 삶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