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은 항상 시련을 맞이한다. 주인공이 힘든 고통과 시련을 견디는 이유는 일상을 찾으려는 의지,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재난물이나 좀비물을 보아도 제1의 목적은 '생존'이다. 난 생존 의지는 강력한 본능이라고 배웠다. 평소에 사고나 재난을 맞이할 일이 없다보니까 나는 그런 의지를 느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마 많은 콘텐츠에서 그렇게 삶의 의지는 강력한 것이라고 묘사해왔다.
그래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내가 재난물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불 속에 드러누워 현실을 도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방안과 책상은 늘 어지러웠다. 의지를 떠나서 삶이란 것은 불안하고 무서웠으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공포스러웠다. 생존의 대한 본능보다 정신적인 고통과 공포가 앞선게 아닐까.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나는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병이 다 나은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약간 이른 판단이었다.
[우울의 바다에 구명보트를 띄우는 법] 이라는 책에서 봤는데, 먼저는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게 우선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우울증에 벗어나기 위해서 이것저것 노력을 하긴 했는데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까지는 최근이었던 것 같다.
난 이제야 한 걸음 뗀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어제는 이 한 걸음이 남루하고 보잘 것 없다고 느껴져 우울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내 생각 습관인가 싶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 그것은 정말 소중한 마음이었고 너무나 중요한 의지였다. 아직도 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서 오늘 하루를 괴로워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 중 누군가가
"나도 병이 낫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살고 싶은 마음이 들죠?"
라고 물어본다면 난 뭐라고 대답해줄 수 있을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나요? 선물 같은 순간이라든가 기적같은 일?"
음, 아니요.
살고 싶어진 게 딱히 상황이 나아져서는 아니다.
좋은 친구들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진 것도 아니다. 나는 작년 한 해 친구를 사귀겠다는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남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트러블만 많이 겪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환멸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작년 한 해 전재산의 80퍼센트를 낭비했다. 폭식으로 인해 말이다. 미래를 위한 준비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살은 너무 쪄서 일생에서 제일 뚱뚱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럼 살고 싶다는 마음은 마치 계시처럼 번뜩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가는 현상인걸까요?"
음, 아니요.
그건 아니었다. 나는 서서히 변해갔다. 가장 결정적인 것 아마도 나 자신의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삶에서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맞이할 때 누가 내 옆에 있어줬는지에 대한 깨달음.
그건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나를 똑바로 보고 나를 불쌍히 여겼고 안타까워했다. 잘 버텨왔다고 칭찬하기도 하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주어진 내 삶을 사랑하게 되면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것 같다.
나는 내가 잘나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내가 예쁘고 멋있어서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돈이 많아서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라서, 나라서 사랑하는 거다. 나는 그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이제는 사랑해줘야지. 행복하게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