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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15. 2024

다음 세대의 길잡이가 되다 (2)

[노년의 화가는 무엇을 그렸나] - 티치아노

16세기 로마에는 라파엘과 미켈란젤로가 서로 다른 색깔과 매력으로 자웅을 겨루며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 당시 베니스에는 티치아노가 있었다. 조르지오 벨리니와 조르지오네의 뒤를 이어 최고의 화가 자리에 오른 티치아노는 베니스의 화풍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자신만의 재능을 발휘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최고의 지위와 명성, 부를 누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로마로 가서 라파엘, 미켈란젤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름을 날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 리가 없었을 터이다. 물론 티치아노는 중년 무렵 로마에서 몇개월 머물며 로마의 풍성한 역사와 유물, 전국에서 몰려든 동시대 예술가들의 최고의 작품들에 영감을 받기도 했다. 로마에서 당시 후원자 중 하나였던 교황의 손주를 위해 초상화와 성화, 신화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을 그리기는 했지만 티치아노는 결국 베니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의 부름을 받아 독일에서 궁정 화가로 지낸 몇 년을 제외하면 티치아노는 90세 가까이 살면서 평생을 자신의 고향인 베니스에서 지냈다. 

뼛속까지 베니스인이었던 티치아노의 성향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모든 사안에 대해 계산이 앞서고 거래에 있어서는 무엇이라도 얻어내고자 한 티치아노였기에 로마에서는 자신이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에서 라파엘과 미켈란젤로를 넘어서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고 로마에 온갖 거대한 후원자가 많다 하더라도 베니스 자체도 충분히 교역으로 인한 경제적 풍요로움과 지리적/정치적 이점을 활용한 영토 확장으로 수많은 후원자가 존재했다. 베니스에서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훨씬 더 이로울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티치아노의 명성은 베니스를 넘어 전 유럽,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에도 도달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모두가 티치아노가 그리는 초상화의 주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고객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였다. 과연 티치아노의 초상화는 최고의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평생토록 아끼고 사랑할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마치 살아있는 듯 생기와 생명력이 느껴지는 살결, 그리고 눈 앞에서 직접 마주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눈빛은 물론 전체적으로 호감이 가는 인상과 편안함, 자연스러움이 뛰어났다.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 5세의 첫 초상화는 [개와 함께 있는 황제 카를 5세](1532-1533)였다. 이 그림을 받아든 카를 5세는 흡족해하며 앞으로 자신의 초상화는 티치아노만이 그릴 수 있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오리지널 작품이 아니었다. 티치아노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케치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동안만 카를 5세를 볼 수 있었기에 티치아노는 오스트리아의 야콥 자이제네거 (Jacob Seisenegger)가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림을 완성해야만 했다. 얼굴과 의상 등 모든 디테일을 오로지 이 그름에 의지해야 했던 티치아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야콥이 그린 그림의 단순한 복제품처럼 보인다. 당시 복제품은 흔한 일이었고 카를 5세가 직접 보고 그리라고 야콥의 그림을 보내주기까지 했으므로 사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티치아노의 그림은 야콥의 그림과는 확실히 달랐고 카를 5세를 만족시킨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살아숨쉬는 듯한 생생함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가장 최고의 버전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분명히 야콥의 그림과 티치아노의 그림 속 인물은 동일인이고 자세와 의상 등 모든 것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또한 확실히 달랐다. 야콥의 그림 속 카를 5세는 생기가 없고 얼굴 표정도 밋밋한 반면 티치아노의 그림 속 카를 5세는 살아있는 듯 생기가 있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할 것처럼 현장감이 있고 심지어 가까이 옆에 서있는 개와의 교감도 느껴진다. 카를 5세의 얼굴과 신체의 모든 약점을 가리거나 변형해서 카를 5세가 아닌 미남을 그리지도 않았지만 그림 속 카를 5세는 누가 봐도 분명 카를 5세 그 자신인 동시에 충분히 호감이 가고 매력적이다. 

[뮐베르트 전투의 카를 5세](1548)

카를 5세의 초상화 중 최고봉은 티치아노가 그린 [뮐베르트 전투의 카를 5세](1548)였다. 당시 카를 5세는 중요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와 정치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삭소니 지방의 선제후 프레드릭 4세의 저항으로 나타났다. 삭소니 지방의 저항에 맞선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승리를 기념해 그린 초상화인 이 기마상은 카를 5세 초상화 중 대표작은 물론 전체 기마상 중 최고봉으로 꼽힌다. 용맹함과 의지, 집념 등 영웅적 면모가 얼굴과 자세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카를 5세가 타고 있는 말은 물론 갑옷과 창, 심지어 그림 속 시간과 공간의 묘사까지 그림 속 모든 요소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후 카를 5세는 고인이 된 자신의 아내 이사벨라는 물론 아들 필립 2세의 초상화 등을 티치아노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은 각각 최고의 성과로 남았다.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카를 5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곁에 가까이 두고 아꼈으며 필립 2세의 초상화는 티치아노가 카를 5세에 이어 필립 2세로 이어지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그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고 생기가 있으면서 아름다운 인물을 그리는 데 능했다. 그리하여 아무리 다른 그림을 카피한다고 해도 티치아노의 그림은 티치아노만의 특징이 살아있었고 그 특징은 티치아노를 당대는 물론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모든 이로부터 최고의 실력자라 인정받은 티치아노는 초상화는 물론 성화와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린 그림들에서도 뛰어났다. 성화의 경우 구도는 물론 색감과 인물의 표정이나 동작 등 표현에 있어서 기존의 그림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따라서 티치아노의 그림은 그 누구도 그린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그림으로 나타났고 이는 때로는 의뢰인의 거부나 불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티치아노의 출세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모 승천](1518)은 성모의 역동적인 동작과 화려한 색감, 독특한 구도로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림이 놓인 산타마리아 데이 프라리 성당의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공간에 딱 들어맞는 과감하고 강렬한 그림으로 더없이 잘들어맞는 선택임이 드러났다. 기존의 성모승천 그림이 가지고 있는 경건하고 고요한 모습과는 달리 양팔을 벌리고 하늘에 떠 있는 성부를 바라보는 성모의 모습은 극적이고 강렬하다. 땅에서 승천하는 성모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 또한 지나치게 크게 그린데다 어지럽게 엉켜있는 듯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위, 중간, 아래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그림은 그림 속 인물들의 동작과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에서 위로 순차적으로 이동하다가 결국은 정가운데 위치한 성모에게로 향하면서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티치아노는 베니스 정부의 대표화가로 면허와 연금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할 티치아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활용하여 여러 다양한 의뢰인들로부터 그림을 의뢰받아 쉬지않고 그림을 그렸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의뢰와는 별개로 수금 작업이 만만치 않아 티치아노는 눈코 뜰새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에는 자신의 작업실에 조수를 여럿 두고 마치 공장처럼 그림들을 완성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혼자서 온전히 그릴 때에 비해 뒤떨어지거나 모자라지는 않았다. 스케치는 물론이고 수시로 작업중인 그림들을 관리 감독하면서 완성도에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티치아노의 뛰어난 능력은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그의 그림이 아닌 것이 너무도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특히나 티치아노의 누드는 그만의 특별함이 있었다. 스승인 조르지오네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대신 티치아노는 현실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한 절세의 미인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는 편이었다. 이는 어쩌면 의뢰인이 원하고 좋아할 만한 그림에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조르지오네의 화풍을 열심히 참고하고 그의 그림을 적극 차용하면서도 티치아노는 자신의 그림에 혈색과 살결은 물론 현실적인 장신구와 소품 등을 추가해 마치 현실 속에 있음직한 모습을 구현해내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과 [안드리아인의 바카날](1538-1539)은 모두 신화 속 인물이나 장면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은 현실적인 모습을 충분히 내비치고 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 여인은 완벽한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지만 방금 목욕을 마치고 하녀가 준비하는 옷을 기다리며 한가로이 누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환상 속의 여신이 아닌 당시 베니스의 여인인 것이다. 또한 [안드리아인의 바카날] 속 우측 하단의 누드는 놀랍도록 과감하고 관능적이어서 환상 속 장면같은 반면 옷을 걸치고 있는 여성들이 어깨와 가슴 상단, 허벅지 등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마치 현실처럼 그려졌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자유자재로 환상적인 요소와 실질적인 모습을 넘나들며 자신의 그림에 생생함과 현실성을 불어넣었고 이는 신화 속 이야기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관객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했다. 


이렇듯 모든 분야에 걸쳐 쉬지 않고 이어져온 티치아노의 왕성한 활동은 나이의 구애도 받지 않았다. 1550년 60대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 속 티치아노의 모습은 주름진 얼굴과 하얗게 샌 수염에도 불구하고 다부지고 강인한 인상을 풍긴다. 평생에 걸쳐 이룬 자신의 업적이 목에 주렁주렁 건 기사 작위의 금빛 체인은 물론 고급스러운 옷에 드러나고 커다란 풍채와 날카로운 눈빛,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를 통해서는 나이가 반드시 육체적, 정신적 노쇠와 동일한 의미는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로 티치아노는 이후로도 20년 넘도록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특히나 80대에 그린 [타르킨과 루크레티아](1571)는 커다란 동작과 화려한 색감으로 긴박함, 강렬함을 선사하는 역동적인 작품이다. 칼을 들어올린 타르킨의 폭력적인 동작과 이에 놀라 두 팔을 들어올린 루크레티아가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타르킨의 붉은 바지와 타이즈, 금발의 육감적인 루크레티아의 살빛, 하얀 침구와 녹색의 커튼 등은 현란하고 어지러운 당시의 상황을 색감으로 훌륭히 표현했다. 더구나 노년의 티치아노 그림에서 보여지는 거친 붓칠과 과감한 색의 덧칠은 이후 바로크 풍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혹자는 전성기 때 티치아노의 명확한 형태와 섬세한 디테일, 매끈한 화면과 달리 흐릿하고 거친 형태와 표면, 다소 어두운 색감 등을 이유로 노년의 티치아노의 그림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완성작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노년의 티치아노는 강조할 부분에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문지르거나 칠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고 형태를 흐릿하게, 색을 어둡게 표현했다. 대신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과감한 동작과 뒤엉킨 인물 등을 통해 그림에 역동성과 강렬한 감정을 집어넣었다. 이는 노년의 나이로 인한 기능의 저하가 아닌 티치아노의 선택에 의한 화풍의 변화로 보는 편이 나았다. 티치아노가 이전에 완성된 그림 또한 이와 같이 수정하기 일쑤여서 제자들이 나중에 제거할 수 있도록 일부러 물감에 올리브 오일을 넣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다시 말해서 노년의 티치아노의 그림이 분명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노년의 티치아노는 신체적 기능의 한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이를 약점이 아닌 오히려 강점으로 활용했다. 형태보다는 색과 명암을 통해 입체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그림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노년의 그림 중 가장 대표작인 [면류관을 쓴 예수](1542-1543)에서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있다. 확실히 젊은 시절의 티치아노 그림과는 다른 면이 있지만 오히려 티치아노의 뒤를 잇는 베니스의 화가 틴토레토는 물론 바로크 풍의 대표 화가 루벤스와 렘브란트를 연상시킨다. 

[면류관을 쓴 예수](1542-1543)

실제로 이 그림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판과 험담을 했지만 틴토레토는 티치아노가 의도하는 바와 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 그림을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해 자신의 스튜디오에 놓고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렇듯 노년의 티치아노는 단순히 젊은 시절에 비해 뒤떨어지는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여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정확한 선과 매끈한 면의 처리를 통해 그림의 리얼리티와 완성도에 초점을 두는 그림에서 색의 조화와 거친 표면, 과감한 동작과 구도를 통해 시선을 사로잡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그림의 가능성을 보여준 노년의 티치아노. 그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노년이 쇠락이 아니라 전환이며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을 넘어 노년에도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재능과 다음 세대는 물론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향력을 통해 나이의 한계를 넘은 대가, 아니 오히려 나이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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