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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15. 2024

다음 세대의 길잡이가 되다 (1)

[노년의 화가는 무엇을 그렸나] - 피카소

데 그것은 다소 의외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바로 고전의 거장이나 동시대의 거장의 그림을 모티브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장들의 그림은 물론 자신의 그림에 대한 헌사로 나타났다. 

그림은 피카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모더니즘을 확실히 일군 유일무이의 거장 피카소. 하지만 그의 그림을 한마디로 간단히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다. 과거의 그림 스타일을 모두 섭렵한 것은 물론 미래의 다양한 그림 스타일에 영감을 주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추구한 피카소의 천재성은 따라서 그의 놀라운 집대성의 능력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들을 그려나간 피카소의 에너지는 그의 천재성을 충실히 보여주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림을 가르치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  피카소는 이미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아카데미 미술을 마스터하는 실력을 갖추었다. 그의 작품 ‘Science and Charity’(1897)는 그 해 열린 국립미술전시회(National Exhibition of Fine Arts)에 출품되어 주목할만한 부문의 상을 받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그림으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실을 확인한 그 해에 피카소는 주어진 길을 마다하고 새로운 길을 나섰다. 

동시대 유럽의 예술 조류가 자유롭게 흘러 넘치던 대도시 바르셀로나로 향한 피카소는 그곳에서 당시의 모든 기법들을 스스로 터득하고 체감하면서 자신을 단련해 나갔다. 인상주의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개성적인 스타일들이 우후죽순 자라나기 시작한 당시의 움직임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 후기 인상주의라는 편리하지만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피카소는 후기 인상주의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작품 스타일을 스스로 체현해 나갔다. 고흐와 같은 거친 붓칠과 강렬한 색을 사용하기도 했고 헨리 톨루즈 로트렉처럼 포스터풍의 일러스트를 그리기도 했으며 몽환적이고 음침한 느낌의 상징주의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카페, 매춘부 등 거리의 모습을 에드가 드가 스타일로 담아내기도 했고 스페인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투우장의 모습을 두꺼운 물감을 짓이겨 투박하게 발라내기도 했다.    

1904년부터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피카소는 조금씩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00년부터 1906년까지의 피키소 그림들은 ‘Blue Period’와 'Rose Period’라 불리우며 이는 캔버스의 배경 등 전체적인 색감에 따라 블루와 로즈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시기 피카소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이 당시 그림들의 특징은 인물들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대부분 무표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Blue Period’의 그림들은 다소 세기말적인 느낌이 강하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주로 가난에 찌든 여인이나 엄마와 아이, 연인, 노인 등이 수척하고 퀭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알레고리적인 요소들로 충만하다. 로즈 시기에는 전체적인 색감이 장밋빛을 띠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로 서커스 단원들이나 그 가족들, 동료 예술가 등으로 변화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가득하고 우울함이 넘쳐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예술가들 사이에 드리운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스타일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1907년작 ‘Les Demoiselles d’Avignon’은 그림의 스타일은 물론 그림의 정의를 바꾸는 획기적인 그림으로 자리한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리는 이 그림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여인들의 누드라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 모습이 전혀 아름답지도 않았고 사실적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화려한 색으로 장식적인 느낌을 주지도 않았고 거의 시각에 테러를 가하는 듯 충격적이기만 했다. 고대 조각상이나 아프리카 가면을 연상시키는 얼굴에 관절 마디 마디가 분절된 듯한 신체는 날까롭고 뾰족하면서 음산하고 기괴했다. 마치 몸의 온 부분이 조각나면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듯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어딘지 모르게 아찔하다. 얼굴에서는 여전히 암울함과 공허함이 짙게 드리운다.  

비록 당시 유행하던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의 전시에서 영감을 받았고 형태를 면으로 구분하여 인식하고 표현하는 세잔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피카소의 그림은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피카소의 열정과 에너지, 가능성에 깊이 매료된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를 그린 피카소에게 누군가가 전혀 닮지 않았다고 평하자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이 전해지듯이 이는 피카소의 그림과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 및 운명을 예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피카소의 그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그림이라는 평가에 대해 피카소 자신이 미래의 그림은 이렇게 달라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후 피카소는 브라크와 손 잡고 입체파의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모든 형태를 분해해 재조립하여 보여주는 ‘분석적 큐비즘’에서 시작하여 전혀 연관없는 것을 조합하여 기적처럼 형태를 완성해가는 ‘합성적 큐비즘’까지 모든 것을 섭렵하면서 피카소는 자기만의 색깔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피카소에게는 그의 과거가 그의 미래를 발목잡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입체파를 창시하고 완성했다고 해서 자신의 그림이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경계도 간단히 넘어서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는데 그것이 입체파 이전의 다소 정상적인(?) 그림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부피감의 인물들을 그리거나 친구와 아들을 모델로 광대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리되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는 식이었다.  

이렇듯 계속된 그림에 대한 실험도 시대의 검은 그림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시대가 영웅을 만들었듯이 시대가 위대한 작품을 만든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는 그렇게 탄생했다.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던 1930년대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에 절망을 담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피카소의 지금까지의 실험은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표현하는데 아낌없이 활용되었다.

[게르니카](1937)

독일군에 의한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살상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든,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든, 미움과 욕심에서 나온 비뚤어진 맹목에서든 전쟁의 시작은 추악함에서 시작하지만 전쟁의 끝은 무참함으로 끝이 난다. 살상과 절망을 표현함에 있어 피카소의 사방으로 분절되고 왜곡된 육체와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얼굴은 잘 들어맞았다. 목숨을 잃고 축 늘어진 아기의 몸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엄마의 손짓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전달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두 팔을 치켜 올린 여인의 처절함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더욱 더 애잔하다. 공포는 두 눈과 입에서 가장 잘 표현되듯이 절규하는 입 모양은 측면으로 보여주면서 두 눈을 정면을 향하도록 모두 보여줌으로써 고통과 황망함, 슬픔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우화적인 요소로 소와 말이 등장하여 잔인한 학살자의 추악한 무덤덤함과 무참히 죽어가는 시민의 참혹한 절규를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무채색으로 드리운 거대한 벽화는 죽음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마치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암울하고 불안했던 이유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피카소의 그림에 내재하던 음울하고 비관적인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엄청난 포효와 에너지가 넘쳐난다.  

사실 ‘게르니카’의 경우 민간인 폭격과 살상이라는 전쟁의 광기와 그로 인한 공포, 희생을 담아낸 것으로 특히나 암울함이 짙게 배어있지만 피카소의 그림에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 죽음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왔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도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특히 오른쪽 두 여인의 얼굴이라기 보다는 가면에 가까운 칙칙한 모습을 통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가 위협적이지는 않은데 삶이라는 것은 생기와 사랑으로 충만하지만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분명 똬리를 틀고 전면에 등장하여 보는 이를 뚫어져라 응시하거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다른 여인들을 쏘아보고 있지만 이들 또한 나머지 여인들과 따로 또 같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뚜렷해졌고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에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있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소 의외의 방식으로 나타났다. 바로 고전의 거장이나 동시대의 거장의 그림을 모티브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장들의 그림은 물론 자신의 그림에 대한 헌사로 나타났다. 17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화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위치를 그림을 통해 드러낸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를 모티브로 삼은 ‘The Maids of Honor’ 시리즈도 화가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들 그림 속 형태는 무척 단순하다. 특히 인물의 경우는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눈코입, 손만 간신히 표시가 되어 있고 나머지는 붓칠과 검은 테두리로 엉성하게 그려넣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티스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모습을 꽤 높은 비중으로 그려넣은 것에 비해 피카소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거의 표시가 나지 않게 하거나 아예 그려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그린 그림 중에는 화가와 모델을 그린 스튜디오 그림도 있었고 자화상 그림도 많았다. 하지만 이 시기 피카소는 자신보다는 그림을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던 듯하다. ‘The Studio of La Californie’(1956)에는 이젤에 놓인 백지 상태의 캔버스와 스케치를 하다 만 그림, 완성된 듯한 그림이 바닥에 나란히 놓여있다. ‘The Maids of Honor’에도 벨라스케스가 스튜디오로 사용하던 공간이었음을 환기시키듯 벽에 그림들이 걸려 있다. 즉, 화실은 모델도, 화가도 아닌 오직 그림만이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녀들](1957)

이후 91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왕성한 에너지로 그림을 그려나간 피카소는 그림에 완벽한 자유를 부여한 최고의 작가였다. 그림에 대한 고백과도 같은 피카소 말년의 그림들은 거침없고 과감한 붓칠과 강렬함으로 가득한 얼굴 그림 (자화상 포함)이 대부분이다. 특히나 죽기 몇달 전에 그린 [Self-Portrate Facing Death](1972)는 제목에서처럼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피카소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려움인지 공포인지 그의 눈은 온통 열려있다. 눈동자도, 눈알도, 눈 근육도 모두다 최대한으로 뜬 상태다. 심지어 콧구멍도 최대로 열려있다. 오로지 입술만 꾹 닫고 있을 뿐이다. 눈물을 참고 있는지 고통을 참고 있는지 모르겠는 그의 얼굴은 하지만 나약하기 보다는 결연하다. 죽음 앞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존재를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앞둔 자화상](1972)

하지만 이를 강한 자아의 표현이라고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이 생전 이루었던 화가로서의 위상과 업적이 화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후대의 그림으로 영원히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가면을 그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피카소의 노년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프리카 가면이 지닌 주술적 의미를 고스란히 화면에 담아낸 그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결국 그림은 시대와 인물을 넘어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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