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화가는 무엇을 그렸나] - 쿠르베
리얼리즘 화가로 명성이 높은 구스타브 쿠르베는 마네, 모네, 드가, 세잔 등 19세기 후반의 모더니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피카소, 달리, 에드워드 호퍼 등 20세기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쿠르베의 혁명적인 작품 ‘A Burial at Ornans’(1850)나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The Stonbreakers’(1849), ‘The Painter’s Studio’(1855)는 모두 리얼리즘과 당시 화가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담은 작품들이다.
특히, ‘The Painter’s Studio’는 화가, 그림, 사회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작품으로 일종의 은유 또는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쿠르베는 오른편에는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사람들, 왼편에는 사회의 각계 군상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중앙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화가인 자신이 그림을 통해 중재하고 있는 듯한 해석이 가능하다.
화가인 자신에게는 양쪽 세계 모두가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쿠르베는 화가란 현실의 세계를 바라보고 기록하여 이를 예술애호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에 박힌 기존의 신화나 역사 속의 이야기나 주제, 쓸데없이 디테일하고 불필요한 테크닉의 구사로 대표되는 아카데미의 그림들은 의미가 없고 진부하며 감상적이라고 여겼다. 이미 자신의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을 그림의 모델로 삼아 역사화에나 어울릴 법한 커다란 그림으로 그림으로써 아카데미는 물론 평단으로부터 논란을 불러일으킨 쿠르베는 마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쿠르베는 1855년 엑스포지션 유니버설(Exposition Universelle)에 전시될 14개의 작품을 살롱에 제출하지만 그 중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작품 2개 ‘A Burial at Ornans’와 ‘The Painter’s Studio’가 거절을 당한다.
사실 처음부터 엑스포지션과는 독립된 자신만의 전시장을 마련하고 싶었던 쿠르베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신의 가장 절친하고 아낌없는 후원자 알프레드 부루야스에게 지원을 부탁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터였다. 하지만 막상 살롱으로부터 자신의 중요한 작품이 거절당하자 더는 참지 못하고 독립된 전시공간을 마련하기로 다시 한번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엑스포지션 건물 옆에 가건물을 지어 위의 작품 2개를 포함해 자신의 작품 40개를 전시하여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전시장의 이름은 당연히 ‘Le Realisme’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과 성과는 저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베의 원맨쇼는 훗날 권위적인 살롱에 반발하는 모더니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의 원천이자 훌륭한 선례가 되었다.
쿠르베가 화가로서 원한 것은 온전한 자유로, 그는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종류나 형식의 구속도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아카데미가 제시하는 특정 주제, 기법, 형식을 무시하고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캔버스에 충실히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쿠르베를 사회 반항적인 리얼리즘 화가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이해한 것이 된다. 쿠르베는 성경, 신화, 역사, 문학에서 영감을 얻는 대신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 더 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캔버스에 충실히 담아냈다.
쿠르베가 그린 풍경화, 누드, 동물화, 초상화, 정물화는 따라서 리얼리즘 화가 쿠르베가 그린 의외의 그림들이 아니라 자유와 진실(실체)을 추구한 화가 쿠르베의 당연한 그림들이다. ‘The Painter’s Studio’에서 쿠르베가 그리고 있던 그림도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 마을의 풍경을 담아낸 풍경화였고 쿠르베의 뒤에 누드의 여인이 서 있었으며 어린 아이와 고양이 한마리도 캔버스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쿠르베가 그린 풍경화는 평화롭고 낭만적인 때로는 신비로운 전원의 모습과는 그 결을 달리한다.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깎아지른 절벽의 돌산이나 계곡을 그렸고, 고향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강의 시원에 해당하는 동굴의 폭포를 그렸다. 그가 그린 파도 시리즈는 하얀 포말을 그리며 높이 솟구쳐 오르거나 굽이치는 움직임으로 압도한다.
사냥을 즐겼던 쿠르베가 그린 야생 동물의 그림들도 멋진 의복을 차려입은 귀족들의 놀이와 스포츠로서의 활동이나 웅장하고 용맹한 영웅적 전사 또는 이국적이며 거칠고 사나운 야생 동물의 포효와 같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숲을 공유하는 시골 마을과 야생 동물의 공생과 경쟁 등 생존을 위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장을 담거나 또는 야생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이렇듯 쿠르베가 그린 풍경과 동물 그림들은 모두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뚜렷한 실체의 대상들이다. 막연한 분위기나 느낌을 전달하기 보다는 낯설 정도로 가까이에서 탐구하듯 그려나간 그림들은 존재의 존엄성을 전달하고 어느덧 전율을 느끼게 한다.
쿠르베가 그린 야생동물이나 풍경화 등은 꽤 인기가 좋아 그는 단순히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에 머물지 않고 명성과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는 영역이 또 있었는데 바로 누드였다. 역시나 쿠르베는 누드의 이상화에 반대했고 남성 관람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혹적인 누드를 지양했다.
그 시작은 1853년 작품 ‘The Bathers’였다. 숲 속의 호수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누드였다. 살이 찌고 육중한 몸매로 인해 울퉁불퉁한 살점과 접히는 살, 펑퍼짐한 엉덩이가 눈에 가득 들어올 뿐이다.
당연히 이 그림은 1853년 살롱에서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시를 둘러보던 나폴레옹 3세가 얼굴을 찌푸리며 지팡이로 그림을 내리쳤다고 전해한다. 다행인 것은 알프레드 부리야스가 이 그림을 구입했고 이를 시작으로 쿠르베와 부리야스의 긴밀한 관계가 지속되었기에 쿠르베의 화가 인생에 있어서는 더 없이 중요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이후 1864년 쿠르베는 살롱에 전시하기 위해 ‘The Awakening(Venus Pursuing Psyche with Her Jealousy)’를 출품했으나 레즈비어니즘을 연상시키는 외설적인 그림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여기에서 물러날 쿠르베가 아니었기에 위 그림 속 프시케를 본 따 ‘Woman with Parrot’(1866)를 그려 다시 한번 출품했고 마침내 그 해 살롱에서 찬사를 이끌어냈다.
더욱 더 노골적이고 외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누드는 당시 파리에 머물던 터키 외교관의 의뢰를 받아 그린 2개의 작품 ‘The Origin of the World’(1866)와 ‘Sleep’(1866)이었다. ‘The Origin of the World’는 누워있는 여성의 상반신과 허벅지, 그리고 성기가 노출되어 그림의 전면에 등장한다. ‘Sleep’은 두 명의 여성이 누드로 서로 뒤엉켜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으로 명백한 레즈비언 커플을 그린 그림이다.
이렇듯 어느 면에서 보나 논란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누드를 그린 쿠르베의 의도는 그러나 단순한 외설이나 성적 집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쿠르베의 누드는 그가 야생 동물을 그리고 풍경을 그린 그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생명과 인간이라는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실체로서 여성의 성기를 자각한 것이며 여성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거나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주체적으로 자신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독립적 존재로 부각시켰다. 따라서 여성의 성기, 여성성, 여성의 욕망을 남성이나 남성성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Origin of the World’는 개인 커미션에 의해 그려졌고 이후에도 몇차례 주인을 바꿔 개인적으로 소장되었기 때문에 일반에게 공개가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 프랑스 심리학자 라캉이 구입해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놓기도 했다 - 라캉의 아들이 프랑스 정부에 그림을 기증한 뒤에도 오랫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1988년이 되어서야 오르셰 박물관 쿠르베 컬렉션에 전시가 되었다.
쿠르베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정치적으로 격동이었던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무너지고 파리코뮌이 들어섰을 때 이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이었다기 보다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예술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나 공교롭게 파리코뮌이 단명한 데다 나폴레옹 동상(vendome column)을 무너뜨린 혐의로 인해 새로운 공화정이 들어선 이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에 끝나지 않고 정부가 벤돔 칼럼을 재건하는 비용을 쿠르베에게 청구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등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쿠르베는 어쩔 수 없이 1873년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재건 비용을 마련하고자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병들고 지쳐만 갔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그곳에서 숨쉬고 있고 물과 나무, 동물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이 있는 조국으로 돌아가고 하는 마음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이자 너무도 자연스러운 회귀의 본능이 아니었을까. 결국 1877년 쿠르베는 스위스에서 58세의 나이에 다소 이른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치적인 투옥과 망명에 연루된 말년의 쿠르베의 비참한 심정은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 ‘The Trout’(1872)에서 잘 드러난다. 아가미에 낚시줄이 걸린 송어가 피를 흘리며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쿠르베가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를 끝내 이루지 못한 절망으로 가득하다. 자유를 위해 어떠한 논란이나 비판, 역경도 마다하지 않았던 쿠르베의 마지막 숨은 안타까운 탄식으로, 허망한 절망으로 끝이 나 버린 것일까.
정치적, 예술적 격동의 시대에 화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선언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쿠르베,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진실에 다가가고 자 한 쿠르베, 그 어떠한 잣대도 제한도 거부하고 오로지 독립적인 자아 그리고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고자 했던 쿠르베, 이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담아낸 덕분에 그의 그림은 그 어느 화가보다도 혁명적이고 진실되며 강력하고 다채롭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생명력이 가득하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죽음 앞에 굴복하고 말아야하는 것이 모든 인간 그리고 자연의 운명이지만 이는 곧 끝이 아닌 영원히 반복되고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임을 쿠르베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 생에 대한 강한 끌림과 그 근원에 대한 집착을 그림으로 담아낸 쿠르베의 생에 대한 의지는 따라서 생의 마지막에 더욱 불타오르지 않았을까. 끝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송어의 모습은 안타까움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만이 아닌 열망과 삶에의 의지 또한 내포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