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령 Nov 24. 2022

저 손끝이 야무진 여자에요

손재주 하나 믿고 지금껏 잘 살고 있어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한다는 칭찬이었고, 정말 내가 봐도 나는 손재주가 참 좋았지 싶다. 꼼지락꼼지락 야물딱지게 생긴 손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정성껏 만들고 또 만들던 어린 꼬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린 나에게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을 해주시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내 손이 가진 능력을 굳게 믿고, 내 손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손으로 하는 것에 무엇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략 이런 것들이 있다.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종이접기, 조립하기, 가위질하기, 정리하기, 바느질하기, 만들기 등 말 그대로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을 테다. 여기서 제일 잘하는 걸 딱 하나만 뽑아라면 아마도 난 '글씨 쓰기'가 아닐까 싶다.








"엄마, 나 이번에 또 경필 쓰기 대회에서 최우수상 받았어!" 

"진짜? 넌 진짜 타고났나 보다. 글씨를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잘 쓸까?"


그때가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 싶다. 그 당시에 학교에서는 경필 쓰기 대회가 열리곤 했었는데, 대회가 있는 달이면 반 아이들은 항상 나를 지목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이번에도 쟤가 상 받겠지?", "당연하지. 쟤 글씨 엄청 잘 쓰잖아." 시샘과 칭찬이 반반 섞인 친구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귀에 선명하게 꽂혔고, 난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더욱 안간힘을 다해 글씨를 또박또박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었다.






손재주가 좋으면 칭찬도 많이 받고 자신감이 업되는 날도 많지만, 가끔은 피곤하고 귀찮을 때도 있다. 중학교 때 한창 교환일기, 러브장, 연애편지 이런 것들이 유행했었는데, 친구들은 꼭 나한테 글씨 좀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전혀 관심도 없는 남의 연애편지를 집중해서 읽고 글씨로 옮기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짝사랑하는 남자애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편지를 써주다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글씨를 삐뚤빼뚤 이상하게 써줬던 것 같기도 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대신해서 칠판에 글씨를 쓰기도 했으니, 나의 손글씨는 많은 이에게 인정받은 나의 주특기가 되기 딱 좋은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내 손재주 하나만 믿고 이를 기준으로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십 대 초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나의 손재주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빵을 예쁘게 포장하고, 보기 좋고 먹기 좋게 진열하고, 심지어 제빵기사 언니가 케이크 데코를 나에게 맡길 정도로 나의 손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각종 이벤트가 있는 날이면 선물포장을 하느라 손톱이 부러질 정도였으니, 다음에 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면 절대 빵집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앞으로 꼭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나의 장점이자 최고의 무기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맞아. 내가 진짜 잘하는 건 글씨 쓰기잖아. 근데 글씨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당시 글씨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때라고 하는 시기가 아마도 2009년도쯤이었지 싶다. 내가 아는 거라곤 서예학원이 전부였으니, 그럼 서예를 배워서 서예학원을 차려야 하나 싶었다. 대학에서 청소년 교육을 전공해놓고 나는 전혀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 청소년 상담사가 되고 싶었으나,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기에 나섰다. 그렇게 나는 서예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커다란 붓을 들고 새하얀 화선지를 마주하고서, 새카만 먹물에 붓을 지그시 담갔다가 다시 먹물을 적당히 빼주는 순간이면 온몸에 전율이 찌릿하고 돌곤 했다. '이거구나. 이게 나한테 딱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서예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그렇게 서예를 배우면서 나는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는 책을 보게 된 것이다. 생소한 단어에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고 망설임 없이 책을 꺼내 들었다. 책 내용을 대충 넘겨보니,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서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운명처럼 무언가가 내 안에 훅하고 들어왔다. 이거다. 나는 이걸 배워야겠다. 정적인 틀에 맞추어 가지런히 써 내려가는 서예가 아닌 내 안에 있는 자유로운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글씨를 써보자고. 그렇게 책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 내 삶을 이렇게 바꿔놓은 결정적인 순간이 돼버렸다.






나에게 캘리그래피를 알려준 책, 나에게 캘리그래피라는 것을 알려준 작가는 바로 공병각 작가였다. 그의 책 <손글씨 잘 써서 좋겠다>를 서점에서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책의 모든 글씨가 작가가 직접 쓴 손글씨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이걸 진짜 직접 썼다고?'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놀라웠다. 책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몇 날 며칠을 책에 쓰인 글씨만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그 당시에 정말 나에게는 신선한 발견이자 충격이었다. 직접 쓴 손글씨로 책을 이렇게 만들다니!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도 이렇게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책 제목처럼 손글씨 잘 써서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캘리그래피 독학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살림과 육아에 찌들어서 도저히 글씨 연습을 할 시간이 없었고, 가족들이 잠든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붓을 집어 들었다. 너무 피곤해서 먹물을 바닥에 쏟고 벽에 다 튀기면서 악착같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놈의 손재주 하나만 믿고 열심히 배우고 또 배웠다. 서예를 배운 경험이 있어서 캘리그래피라는 장르가 크게 낯설지 않았고,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나만의 독특한 느낌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족들은 내가 쓴 글씨를 보면서 손이 녹슬지 않았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역시 손재주가 있다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손재주 하나만 믿고 지금껏 살고 있다. 캘리그라피 자격증도 독학으로 취득했으며, 다양한 손글씨 대회, 캘리그래피 대회에 나가서 많은 상을 타기도 했으며, 손글씨가 들어가는 아트상품을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가끔 글씨 의뢰가 들어오면 반가운 마음에 정성을 다해 글씨를 써서 작업을 하고, 가족행사 및 다양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손글씨로 봉투도 만들고, 손글씨가 들어간 머그컵도 만들어서 선물을 하기도 한다. 이 삶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직접 만든다는 것은 참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공품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 사람의 진심이 진한 사골육수처럼 베여있다. 어딘가 엉성하고 서툴어 보여도 우리는 그 안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느끼고 진심을 알게 된다. 








손재주가 좋아서 손으로 진심을 전하고 싶어




이 세상에 손재주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비단 멋지고 대단한 것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손재주가 좋은거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엄마의 손재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틈틈이 뜨개질을 하는 어느 여학생의 손재주, 캄캄한 새벽거리를 오가며 세상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손재주, 어린 손녀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빚어서 예쁘게 묶어주시는 할머니의 손재주에 이르기까지 손끝이 야무진 사람들의 모습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래서 나도 한 번쯤은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기도 하다. 손끝이 야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하여. 지금 당신의 손끝은 어떤 상태인지 한 번 가만히 관찰해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손은 무엇을 움직이고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생, 목표라고 쓰고 목적이라 읽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