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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담쟁이 Oct 30. 2015

나의 흑기사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는 도움이 필요할 때면 청하지 않아도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멋진 흑기사가 한 명 있다. 실제 나이가 사십이 넘은 이 남자는 나이를 물을 때마다 우물쭈물한다. 제 나이도 모르는 그는 여러 가지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중복장애인이다. 사십이 넘었으니 어른 대우를 해 주어야 하지만 난 그를 “인수야”하고 부른다.


  내가 부임해 온 첫 해에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인수는 기형으로 생긴 성기를 수술 받게 되었다. 수술이 잘되었는지 어떤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인수의 장애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체장애, 발달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등이 대략 인수가 가지고 있는 장애들이다. 한 쪽 다리가 짧아 걸음걸이가 온전하지 않은 그의 지능은 대략 70정도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그런 탓에 수화를 익히기에도 한계가 있는 인수와의 의사소통은 간단한 수화 몇 가지 그리고 다수의 몸짓으로 이루어진다.


  어쨌든 인수는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특수학교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빛나는 졸업장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글 역시 그에게는 수화와 마찬가지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졸업 후에도 달리 갈 곳이 없던 인수는 그동안 생활해 오던 시설에 그대로 있으면서 매일같이 등교하였다.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운 좋게 장애인을 뽑는 청소용역업체에 취직이 되어 지금은 파견근무 형태로 모교의 청소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인수가 청소를 담당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학교의 환경이 이전에 비해 뚜렷하게 나아진 것은 없다. 화장실의 휴지는 떨어지기 일쑤이고 현관은 여전히 나뭇잎들로 지저분할 때가 더 많다. 물을 제때에 버리지 않아 정수기에서 나온 물이 복도를 물바다로 만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 “아유, 청소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이게 뭐야”, “도대체 휴지는 언제 갖다 놔. 어이구” 하면서 인수를 찾는다. 그렇다고 인수를 고용한 용역업체에 따질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 곳에서 우리 인수를 해고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느 날 퇴근 무렵이었다. 도서실 문을 잠그려고 보니 도통 자물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날 아침 출근하여 문을 열고 있는 중에 일찌감치 책을 대출하러 온 선생님이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무의식중에 손에 쥐고 있던 자물쇠를 엉뚱한 곳에 두었던가 보다. 복도 앞에 서서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인수가 눈치를 채고 나에게 기다리라는 수화를 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한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아서 필시 잊어 버렸을 거라 생각하고 걸쇠만 걸고 퇴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해서 보니 자전거를 채울 때 사용하는 조그만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순간 자물쇠를 찾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여기저기 뛰어 다녔을 인수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울컥해졌다. 그러나 이내 나타난 인수가 열쇠를 주면서 나에게 수화로 훈시를 한다. “선생님 늙었다. 잊어버리지 마. 기억해. 잊어버리지 마. 기억해”하고 말이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약해지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나의 건망증을 인수도 눈치 채고 말았다.


  중학교 1학년에 자폐를 앓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이 반 담임은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총각이다. 어느 날 복도에서 이 젊은 선생을 마주친 인수가 여학생을 가리키며 “힘들지?”라고 수화를 하곤 네가 말 안 해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선생을 두 팔 벌려 꼭 안아주더라고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인수의 마음 씀씀이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는 어느 반에 어떤 학생들이 있고 그 학생들의 담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데 혹여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이라도 목격하게 되면 담임교사를 찾아가 잘 지켜보라고 충고까지 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 몇 년 동안 학교 폭력이 없었던 것은 인수의 노력도 한 몫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기에 인수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절대 꾀를 피운다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단지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잠시 잊어버렸을 뿐이다. 필시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을 테니까. 제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교사들의 일에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이지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을 보고 비정상이라 하겠지만 조금만 함께 생활해 보면 그의 정신이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누가 도움이 필요한지 혹은 누가 약자인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그들을 향해 늘 도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름다운 에스메랄다가 노틀담의 못난이 꼽추 카지모도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수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으니까. 내일도 사람들은 인수 대신 청소를 하면서 그 앞을 쓰윽 지나가는 인수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 우리가 힘들 때마다 나타나서 두 팔 걷고 도와줄 우리들의 멋진 흑기사이므로.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짠하고 나타나는 짱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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