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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이 이지샘 Feb 14. 2024

대학원에 진학을 했습니다

경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




대학원에 진학했다.

저 한 문장이 내 하루에 가져다준 변화는 엄청났다.

우선 대중교통에 몸담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외버스와 기차를 타는 일이 많아졌다. 대학원 기숙사라는 새로운 공간에 입소했다. 낯선 지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같은 경상도권인데도 미묘하게 다른 사투리에 신기했다. 생각보다 날씨 변화도 달랐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학교 교정과 대학생들의 모습도 신기했다.


대학원생이 되었다.

우선 입학을 하는 것부터가 하나의 언덕이었기 때문에 언덕을 넘은 나는 기대감과 신기함으로 눈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도 잠시. 엄청난 양의 공부거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대학원을 다닌 경험자가 없었기에 대학원생활에 대해 들은 바가 별로 없었다. 그저 배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대학원 생활이, 그 한 마디의 무게가 이리 클 줄은 몰랐던 거지.


대학원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 선택지에는 직장생활이 비교적 가능하며 주로 야간에 강의가 열리는 야간대학원의 형태가 있었고, 낮에 강의가 열리며 주로 대학원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일반대학원이 있었다. 배움이 목적이었기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학교에서 거의 매일 일과를 보내야 했기에 우리 집에서 대학원까지 등하교는 무리였다. 대학원 기숙사를 신청했다. 첫 직장보다는 조금 더 먼 곳으로, 나는 또 한 번 놀이동산에 입장하는 마음으로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강의 시간표를 확인하는데 대부분의 강의명이 'ㅇㅇ세미나'로 되어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강의들을 선정하고 본격적인 1학기가 시작되었다. 대학원은 내가 '누군가'에게 배우는 곳이기보다 내가 스스로 '배워내야'하는 곳이었다. 방대한 양의 책들은 대부분 원서였고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배워내기 전 나는 번역이라는 바위산에 부딪혔다. 영어실력이 출중하지 않은 나였기에 일단은 한국어로 번역을 하고, 번역한 내용을 이해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원서에 대한 내용을 공부함과 동시에 다양한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아야 했다. 연구들 역시 대부분 국외 논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내용의 논문을 '찾는'과정부터가 난관의 시작이었다. 당시 나는 기본적인 논문검색능력도 갖추지 못한 병아리였다.


이때를 생각해 보면 대학원 초반의 생활은 '내 인생을 찾는 여정'과도 비슷했다. 축소판 같았달까. 국외 논문을 찾을 때, 방대한 데이버베이스에서 손을 대는 것부터가 어렵고(외국 데이터베이스 자체는 또 왜 이리 종류가 많은지), 어찌어찌 검색을 해 보는데 거기서 내가 원하는 내용은 왜 이리 찾아지지가 않는지.


어찌어찌 찾은 논문을 한참 번역하다 보면


'하... 이거 아니다...'


내가 원하는 연구자료가 아니었다. 비슷한데 아니다. 이 사실은 번역을 좀 해봐야 보인다. 발을 들여놔 봐야 아는 거지.


한숨을 푹 쉬고 고민을 해 본다.


반이나 번역했는데.. 그냥 이걸로 밀어붙일까. 지금 빨리 다른 걸 찾아볼까.  

으아 스트레스. 으아아악! 결국 다른 논문을 찾는 나.


짜증은 이만큼 올라가 있다. 예민보스 모드다.

나 자신에게 짜증 내고, 옆에 누가 있으면 짜증을 내며 울면서 번역을 하고 자료를 만들고. 내가 세미나 발표자인데 내가 이해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내용 막히면 관련 책들 또 찾아보고.

내가 결정한 거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탓하고 싶어. 짜증 부리고 싶어.

그 시절 내 옆에 있었던 부모님과 친구들, 그리고 같은 세상 속 지인들에게. 그리고 가장 큰 희생양이었던 남자친구에게 내 '찾아가는 여정'을 묵묵히 함께 해주었음에 감사함을 보낸다. 


어휴. 그 짜증을 어떻게 다 받아 주었지?






대학원의 일상은 학회 행사, 대학원 내 행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계망이 좁았고 넓히고 싶지도 않았던 나에게 '행사'는 시작도 전에 고역으로 느껴졌다. 


물론 모든 일정이 다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멀리까지 간 행사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온 날도 있었다. 이런 날은 출발할 때의 고역이라는 마음은 사라지고 돌아오는 길이 뿌듯하고 후련함으로 가득 찼다.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는 중요했다. 어떤 세상이건 그러하다. 사람들은 비슷하지만 다양한 목적으로 이곳에 모였다. 다들 언어치료학을 전공했지만 조금씩 달랐다. 다들 치료사였지만 또 조금씩 달랐다.


아직은 사람을 들여다보는데 익숙하지 않았기에 성급하게 나와 비슷할 것이라 여기다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만 바라보는 바는 모두가 달랐고, 모두의 정답은 없었다. 자신만의 답을 찾아간다는 것이 중요했다. 여러 오해와 갈등이 있었고, 많은 지지와 응원이 있었다. 그렇게 학문에 대해서도,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치이고 구르며 조금씩 배워갔다. 


한 기관에 몸담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다양한 곳에서의 언어치료사들이 모이니 다양한 대상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여러 세상을 조금씩 구경할 기회도 주어졌다. 어떨 때는 나의 세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라 근거 없이 자신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조금 비슷하다 싶으면 몰두했다. 눈앞의 것만이 아닌, 보다 다양하고 멀리 떨어진 것에도 관심을 보이시고 몰두하시는 교수님들의 모습을 뵈며 대단하다고 느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를 넓히려 노력했다. 






석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대학원생'스러워져 갔다. 이때의 나는 여전히 배우는 사람이었다. 다만 뭘 먹어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떠먹여 주던 수준에서 이제는 혼자 조금은 이 음식, 저 음식을 구경해 보고 한 번씩 떠먹어보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까.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나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 한 분께서 타 대학의 특강수업을 한 번 진행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 강의 제안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대학교에 가서 하루 특강을 진행했다.  

이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늘 배우는 사람이었던 내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 처음 강단에 섰던 날. 그날의 떨림과 긴장, 그리고 내 앞에 펼쳐져 있던 많은 눈망울들. 약간의 격양을 품고 호흡도, 속도도 잘 조절되지 않으며 날것으로 강의실을 울리던 내 목소리.


마이크를 잡기 직전까지 마음속에서 쿵쿵거리던 소리들.

'나이도 어린 내가 강의를 잘할 수 있을까?'

'난 다크서클 가득한 석사나부랭이일 뿐인데'


강의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내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려 주는 학우들을 보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내 이야기가 상대에게 공감을, 변화를 준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된 날이었다. 그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대학원에 오길 정말 잘했어. 나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고, 더 배워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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