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승의 날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5년 전, 스포츠클럽 농구부였던 학생들이었다. 5년 전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니, 지금은 고1이다. 키가 엄청 많이 컸다. 130~140cm 정도였던 아이들이 이제 나보다 키가 크다. 변성기가 지나서 목소리도 바뀌었다. 그 조그맣던 아이들이, 펑펑 울면서 농구 경기를 했던 그 아이들이 훌쩍 커서 내 앞에 서 있었다.
2015년 3월, 난 신규발령을 받았다. 학교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근무를 했다. 어느 날, 스포츠클럽 담당 교사형에게 쪽지가 왔다. 자기는 이번에 스포츠클럽 축구 대회를 나가려고 하는데, 너는 농구를 좋아하니 농구대회 한 번 나가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바로 승낙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농구 동아리에 대학생활 4년을 바쳤으니, 그 경험으로 아이들을 잘만 훈련시키면 대회 우승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뒤, 지원자를 모집하자마자 그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운동을 좀 한다는 친구들은 스포츠클럽 담당형이 이미 축구부로 다 데리고 간 상태였다. 그리고 더군다나, 농구부에 지원한 학생들은 5학년이 대부분이었다. 성인 세계에서는 1살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초등학생에게는 1살 차이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크다.
갑자기 의욕이 확 떨어졌다. 우승은커녕, 1승도 불가능할 거 같았다.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는 개뿔, 동네 농구는 그냥 신장이 깡패다...
'평균 키 148cm로 무슨 농구대회를 나간다는 거지?'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대회에 나가면, 6학년 형들이랑 붙어야 한다고, 우리는 키가 작으니 한 번도 못 이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갈 거냐고 물었다. 너희가 나가고 싶으면 선생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선생님, 져도 괜찮아요. 그냥 농구가 하고 싶어요."
그렇게 우리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내 사전엔 대충이란 없었다. 기왕 하는 김에 우승하고 싶었다. 아이들도 우승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우승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훈련이든지 감내하겠다고 했다.
지옥훈련이 시작되었다! 일정은 이랬다.
-아침 7시 반~8시 반: 체력훈련, 드리블 연습
-오후 5시~7시: 전략, 전술 연습, 경기
-주말: 오전, 오후 8시간 이상 농구
아참! 우리 학교에는 농구 골대가 1개가 있었다. 그것도 다 쓰러져가는 내가 발만 살짝 올리면 림을 잡을 수 있는 그런 골대... 시설이 너무 열악했기에 학교에서는 체력훈련과 드리블 위주로 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농구공도 비쌌기에 기존에 학교에 있던 터지기 일보 직전의 낡아빠진 공들로 연습했다. 내가 퇴근한 후에는 동네 아파트 농구골대에서 슛연습을 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나에게 제안을 했던 스포츠클럽 담당형은 예산을 축구부에 거의 다 써버렸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다. 그럴 거면 대회 참여는 왜 제안했는지... 그래도 내 훈련을 따라주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는 평균 신장이 작았지만 대신 빨랐다. 그리고 드리블과 슈팅도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3달간 미친 듯이 체력훈련을 했기 때문에, 공수전환이 빠른 경기라면 우리가 더 우세했다. 속공 연습, 픽앤롤, 스크린 앤 슛 위주로 계속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리바운드가 약하기 때문에 속공 1명을 제외한 4명 모두가 박스에 신경 쓰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진짜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진짜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대회날이 다가왔다. 평균 신장 148cm, 센터 신장 153cm, 6학년 1명, 5학년 7명으로 구성된 00 초등학교 농구부의 첫 출전이었다. 상대팀 학교는 농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엘리트 농구팀으로 한 때 전국 1위까지 했던 학교였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엘리트 농구 경기가 아니라 아마추어 스포츠클럽 경기였다. 시작부터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얘들아. 쟤들한테 쫄 필요 없어. 아까 쟤들 레이업 하는 거 봤지? 너네들이 훨씬 잘해. 수비할 때 팔 꼭 벌리고, 박스 계속 신경 쓰고. 윤혁아 너는 속공 계속 준비하고!"
1쿼터가 시작되었다. 153cm와 175cm의 점프볼 대결이었다. 175cm가 공을 쳐냈으나 몸이 재빠른 윤혁이가 공을 잡았고, 동희에게 패스 그리고 레이업 연결 슛! 첫 득점을 우리가 했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2쿼터까지 우리가 3~4점 정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하면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격 연결과정도 깔끔했고, 박스도 완벽했다. 키가 153cm임에도 불구하고 재경이는 꾸준하게 리바운드를 땄다. 태호는 138cm의 그 가녀린(?) 몸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날려서 상대방의 공을 스틸하려고 했다.
갑자기 상대팀이 전략을 바꿨다. 포인트가드가 바로 센터에게 공을 찔러주었다. 키 175cm의 센터가 공을 들고 손을 위로 뻗으니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마치 어른이 꼬마와 놀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백도어, 스크린, 돌파, 점프슛으로 겨우 득점에 성공하면, 상대팀은 센터에게 패스, 골밑슛으로 너무나 쉽게 득점을 했다. 아이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결국 경기는 패배하고 말았다. 더블 스코어 차이였다.
리그전이었기에 2번의 경기가 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두 번의 경기도 내리지고 말았다. 마지막 경기 3쿼터 때, 윤혁이가 울면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 노력하면 이길 수 있다면서요? 열심히 하면 못 이룰 게 없다면서요?"
그동안 아이들이 피땀 흘리며 고생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순간 울컥했다. 나까지 무너지면 안 되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우리가 그동안 고생했던 걸 떠올려봐.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모든 걸 다 쏟아부으면 최소한 후회는 안 남겠지? 1점이라도 더 넣어보자."
이변은 없었다. 대패했다. 이번엔 트리플 스코어 차이였다. 나도 끝끝내 참다가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이 미안하다. 선생님이 능력이 없어서 졌다..."
그렇게 3개월 간의 우리의 여정은 막을 내렸다. 이듬해 난 바로 군대를 갔고, 그 이후로 오늘 이 친구들을 4년 만에 만났다.
"윤혁아 그때 기억나? 그때 네가 경기 중에 선생님한테 울면서 얘기한 거. '노력하면 이길 수 있다면서요?' 하면서 대든거 기억나? (웃음) 너희들 그때 펑펑 울면서 경기 뛰었잖아."
다들 씩 웃는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쌤. 그래도 그때 진짜 재미있었어요. 주말에 같이 쌤 집에서 치킨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그때 쌤 덩크 시범 보여준다했다가 꽈당했을 때 엄청 웃겼어요."
"얘들아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농구할 거야? 학교 농구 골대 1개에다가 공도 다 낡아빠진 공이고... 그래도 농구할 거야?"
"음... 솔직히 지금 하라고 하면 그때처럼 못할 거 같아요. 근데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면 무조건 할 거 같아요. 진짜 제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살았던 순간이 그 때거든요. 후회는 없어요."
태호가 아쉬운 듯 말했다.
"아... 지금 대회 나가면 최소한 도대회 1등인데..."
30분 정도 얘기하다가 아이들은 온라인 학습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선 홀로 교실에 남아 곰곰이 준섭이의 말을 곱씹어보다 결론을 내렸다.
'실패했으나 후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