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에게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무얼 해도 마음이 공허했고, 항상 불안하고 두려웠다.
사람을 많이 만나면 상태가 괜찮아질까 싶어, 퇴근하고 또래 직장동료들과 어울렸지만 소용없었다. 운동을 좀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요가 학원과 배드민턴, 배구 동호회에 등록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 교육에 대한 예전의 열정이 돌아올까 싶어, 매 주말마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모여 놀고, 심지어는 새벽에 아이들과 등산을 가기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무언가를 배우면 달라질까 싶어, 몇 달간 중국어 학원을 다녔지만 소용없었다. 어떠한 시도도 소용없었다. 그 무엇도 나의 공허함과 불안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변화를 포기하게 되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스스로 벽을 쌓았다. 친구나 직장 동료가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고, 더 이상 운동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우리 반 아이들과 놀아주던 제도는 이미 폐지했고, 중국어 학원도 한참 전에 그만뒀다. 대신 나는 현실도피를 위해 게임에 빠졌다. 하루 10시간 넘게 게임에 몰두했다.
날이 갈수록 나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직장 내 왕따, 학급 붕괴를 초래한 담임교사, 생활 패턴이 엉망인 게임 폐인이 되어있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예전엔 정말 좋았는데... 제발 3년 전, 아니 1년 전 만이라도 되돌아갔으면...'
'이 쓰레기 같은 놈.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길래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아니, 대학생 때 학회장까지 했다는 놈이 직장 내 왕따라고? 겨우 이 정도 슬럼프도 못 이기는 나약한 XX. 차라리 나가 죽어라.'
난 끊임없이 좋았던 과거의 나와 불만족스러운 현재의 나를 비교하면서 자책했다. 자책을 하면 할수록 불안감과 두려움은 증폭되었고, 이러한 감정들을 잊기 위해 게임에 몰두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다고. 나의 경우 매번 자살을 생각하는 극한의 상황까지 치달은 뒤에야 겨우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피해는 막심했다. 내 몸과 마음, 인간관계는 피폐해져 있었고, 무엇보다 1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렸다.
지나가버린 아까운 시간을 만회하겠다 다짐하며, 매 순간을 온전히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뮤지컬, 영상 대회, 버스킹, 브런치 글쓰기 등 많은 것들에 도전했고,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님과 만나 결혼도 했다. 심지어 우리 부부의 유튜브 결혼식 모습이 공중파 방송에 방영되기도 했다. 직장 내 왕따였던 나의 직장 내 포지션은 어느 순간부터 인싸가 되어 있었고, 학급붕괴를 초래했던 최악의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님들에게 사랑받는 교사가 되어 있었다. 매 순간 성장과 배움의 즐거움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설레고 행복했다. 정말 꿈만 같았던 2년이었다.
이미 한 번 크게 슬럼프를 겪어 봤기에, 그리고 당시 상태가 너무나도 좋았기에 다시는 슬럼프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설사 찾아오더라도 금방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슬럼프는 어김없이 나를 또 찾아왔다.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슬럼프는 생각보다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책감, 수치심의 감정이 견디기 힘들었다.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똑같은 함정에 그대로 빠져버렸다는 부끄러움... 불과 얼마 전까지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냈던 나와 비교하면서 현재의 나를 비하하고 책망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비하를 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웹툰이나 주식 같은 중독적 대상에 더 빠져들게 되었다.
비교, 자책 → 공허함, 두려움, 불안 → 중독적 행위 → 비교, 자책 → 공허함, 두려움, 불안... (반복)
'이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의 나였다면 이 공허함과 두려움,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했을 것이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을 자꾸 채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3년 전 슬럼프 때,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공허함은 이러한 것들로 채우기 힘들다.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기로 말이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책하는 행위는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만든다. 이는 일시적인 행동변화나 자극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근본적인 나 자신의 변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 예전엔 이랬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SNS에 보니깐 00이는 요새 1정 연수강사도 하고 방송에도 출연하던데 지금 내 꼴은 뭐지?'
'아 나는 정말 쓰레기야. 자신과의 약속도 못 지키고, 뭔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자책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자책은 현재의 부정적 상황을 연장시키는 행위다. 그리고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그들은 그들만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나만의 템포와 페이스의 인생이 있다. 같은 장르라면 비교가 가능하지만 이들과 나는 아예 다른 장르다. 과거의 나와의 비교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일정 부분에서는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생각, 생활 패턴, 환경, 몸 등 종합해보았을 때, 아예 다른 사람이다. 그럼에도 굳이 계속 비교를 하고자 한다면,
비=비참해지거나
교=교만해질 뿐이다.
슬럼프에 빠지면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계획을 세운다. 웹툰 한 번에 끊기, 헬스장 바로 등록해서 몸짱되기, 교내 영상동아리 만들기, 영상대회 참가해서 상타기, 다시 브런치글 매일 쓰기, 일주일에 적어도 책 2권씩 읽기, 노래 유튜브에 올리기 등등... 온갖 기대와 희망을 품으면서 슬럼프에서 벗어날 계획들을 세우며 상상한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하는 상상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구분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이미 모든 게 이루어진 것처럼 만족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실천 없이 계획만 짜는, 계획 중독자들도 상당하다. 나의 경우도 실실거리며 계획만 세우다가 정작 해야 할 것들을 못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슬럼프에 빠지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모든 게 멀쩡했던 예전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기에 예전과 같은 것들을 기대하면 안 된다. 계획을 세우더라도 기대치를 확 줄여서 현재 내 상태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들부터 실천하자.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기, 밥 제때 챙겨먹기, 운동 하루에 10분 이상하기, 책 하루에 10p 읽기 등등... 하루에 1%씩만 바뀌어도 복리효과로 인해 72일 뒤에는 내 상태가 2배로 좋아질 수 있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좀 오글거리지만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 무엇보다 근본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사랑은 그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에 비해서 현재 내가 못나더라도 나는 나를 사랑해.'
'오늘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나는 나를 사랑해.'
'오늘 교장선생님께 혼이 났지만 나는 나를 사랑해.'
'우와!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정리를 했네? 대단하다. 교실남, 사랑해.'
'오늘 밥을 제때 챙겨 먹은 나 자신을 칭찬해~ 그리고 사랑해.'
자기 사랑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독적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결핍이 없다. 나 자신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공허함도 없다. 마음에 공허함이 없으니 그것을 채울 중독적 행위도 필요 없다. 둘째, 내 의식을 미래나 과거에서 현재로 돌려, 현재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다. 혹자는 자기 사랑이 혹여나 잘못에 대한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될까 봐 우려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자기 사랑을 하면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된다. 매 순간 자기 사랑을 외치면 작은 것들에도 절로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교육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등 그 어떠한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비교와 자책을 멈추었고, 계획에 너무 집착하지도 않았다. 대신 작은 변화들에 집중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나 자신을 응원하고 사랑해주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독서하는 교실남 멋져. 사랑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운동 나가서 교실남 칭찬해. 그리고 사랑해.'
'오랜만에 글을 써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놓지 않고 글 쓰는 모습 멋져! 사랑해!'
자기 사랑의 힘으로 나는 2주 만에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덕분에 목표나 계획으로도 얻을 수 없는 마음의 근본적 치유를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불행이나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단단한 뿌리도 갖게 되었다.
오늘부터 자기 사랑 어떠신가요?
PS 다음 시간에는 슬럼프 상황에서 환경설정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