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 정리를 하다가 내 흑역사를 발견했다. 그 흑역사는 다름 아닌 4년 전, 군 복무 말년 병장 시절 쓴 비전노트였다.
(너무 자세히 읽지는 말아주세요...)
당시 나는 론다 번의 시크릿 광팬이었다.(지금은 좋아하지 않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라는 역대급 사기 스킬 같은 문구에 현혹되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현재 시제로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작성했다.
읽어보니 가관이다. 낯빛이 저절로 뜨거워진다. 옆에서 아내가 나의 흑역사 비전들을 듣고는 야유를 퍼붓는다. 몇 년 사이에 내 가치관이 참 많이 바뀌었다 싶다.
그 시절 내가 관심 있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성, 외모(피부, 얼굴), 건강(운동, 농구, 시력), 음악(작곡, 노래, 악기), 당구?, 타인의 인정(군대, 학교), 자기계발(독서, 영어, 대학원), 돈 등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이 컸던 것은 이성이었다. 일병 2호봉 때,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로 전역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귄 적도 여자사람친구조차 거의 만난 적이 없었기에, 연애에 대한 열망이 강력했다.
두 번째 관심사는 외모였다. 당시 나는 군대에 입대한 이후로 생긴 여드름과 피부 노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군입대 전 측정했던 21세 피부 나이가 전역 즈음 30살로 늘어있었다.(당시 27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얗고 동안이었던 내 이미지 말고 지금의 까무잡잡하고 노안인 나를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에 대한 두려움 등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때는 대인기피증까지 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세 번째 관심사는 자기계발이었다. 군대 안에서도 나름대로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일과 중에는 짬이 날때마다 독서를 했고, 일과 후 저녁 시간에도 TV 대신 책을 봤다. 덕분에 독서 관련 포상도 여러 번 받았다.
분명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7개나 되는 비전들 중에서 이룬 것들이 단 하나도 없다. 단 한 개도 말이다... 그 이유는 뭘까? 자기계발과 리더십 전문가인 마이클 하얏트는 그의 저서 <모두를 움직이는 힘>에서 성공 가능한 비전의 3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과연 내 비전들이 이 3가지 조건에 부합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자.
1. 당신의 비전은 명확한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분명할수록, 더 빨리 더 안심하면서 갈 수 있다. 반대로 모든 게 불분명하면, 느리게 그리고 불확실함 속에서 나아가야 한다. 명확함이 없을 때, 인생이나 비즈니스에서 길을 찾는 일은 눈보라 속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두를 움직이는 힘> p.115
과거 비전노트를 보면, 비전들이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구체적인 날짜까지 현재시제로 적혀 있고, 수치나 데이터 부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일단 비전이 너무 많다. 차를 모는 중, 시간은 한정적인데 목적지가 너무 많아서 갈팡질팡하는 꼴이다. 우리 인간은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주의 전환이 빨라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멀티태스킹은 아니다. 더군다나 주의 전환은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비전도 이와 비슷하다. 여러 개의 비전을 동시에 추구할 수는 있으나, 이 비전, 저 비전을 왔다 갔다 거리면 그만큼 빨리 지쳐 버린다.
여러 가지 난잡한 비전들을 하나로 모을 구체적이고 명확한 비전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사실 과거 비전노트의 비전들은 비전이라기보다는 어떤 비전을 이루기 위한 목표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비전이 무엇인지가 내 비전노트에서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가 않다.
2. 당신의 비전은 영감을 주는가?
만약 당신의 비전 스크립트가 가슴과 머리, 그리고 열정과 창의력에 불을 지필 수 없다면, 당신은 인재들을 동원할 수 없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필요한 조직의 동의도 얻어낼 수 없다. (중략) 영감을 주는 비전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 둘째, 점진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이다. 셋째, 어리석지 않고 위험하다. 넷째, 방법이 아닌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모두를 움직이는 힘> p.125
과거의 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비전노트를 아무리 읽어봐도 정말 영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기하급수적이지도 않다. 목표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어리석어 보인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자존감이 낮고, 인정 욕구와 자존심이 강한 아이가 호기롭게 작성한 느낌이랄까? 나조차도 이런 느낌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안 봐도 뻔하다.
아... 과거의 나 자신아... 미안해... ㅠㅠ
3. 당신의 비전은 실현 가능한 것인가?
비전에서 출발해 역으로 전략을 만들고, 그럼 다음 목표를 수립하고, 그다음에 목표를 의미 있는 중간 과제로 분해한다. (중략) 비전과 연관성이 없는 상태에서는 더 크고 더 중요한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업무를 수행하다가 끝이 나는 경우가 있다. (중략) 실제로 당신의 비전과 일일 과업을 이어주는 선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모두를 움직이는 힘> p.148-149
내 비전이 실현 가능한 상태가 되려면, 내 하루의 과업과 비전이 연결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난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 강조하는 심상화를 가끔 했을 뿐, 하루 일과 동안 비전 실현과 관련된 행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니, 비전과 하루 일과 자체를 연결시켜볼 생각을 안 해봤다. 그냥 심상화만 하면 모든 게 마법 같이 이뤄질 줄 착각하고 있었다. 아무런 행동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가(=노력, 실천)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마이클 하얏트는 비전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비전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연간계획, 분기별 목표, 주간 목표, 일일 과업 순으로 선을 연결해볼 것을 제안한다. 우선 비전 스크립트에 따라 비전 실행을 위한 7~10가지 연간계획을 세운다. 분기별로 그중 2~3가지 달성할 것들을(Big3)를 계획한다. 분기별 Big3를 달성하기 위한 주간 Big3도 작성한다. 주간 Big3를 달성하기 위한 일일 과업 Big3도 작성한다. 유독 3을 강조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모든 집중을 쏟기에 가장 적합한 수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4년 전 나의 비전은 명확하지도, 영감을 주지도, 실현 가능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실패했다.
실패한 비전노트를 밑거름 삼아, 이번에 새로운 비전을 작성해보았다. 명확하면서 영감도 주고, 실현 가능한 비전 말이다. 다음 편에서 나의 비전을 공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