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남 Nov 13. 2021

아이와 함께 우는 선생

작은 관심이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선생님, 오늘 찾아봬도 될까요?"


얼마 전, 올해 중학생이 된 민지(가명)오랜만에 학교에 찾아왔다. 민지는 3년 전 내 제자다.(당시 민지는 4학년)


중학교 생활은 어떤지,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요새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떤지,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고 있는지 등등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갑자기 민지가 예전 기억을 꺼냈다.

"선생님, 혹시 그때 기억나요? 저 그때 왕따 당했을 때, 선생님도 저랑 같이 우셨잖아요."


"음... 그랬었나? ㅎㅎ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저는 그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요. 그때 선생님도 4학년 때 왕따 당해본 적 있으시다고, 제 마음 이해한다고, 그리고 선생님이 극복한 것처럼 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셔서 엄청 도움이 됐어요. 근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니 실망..."


"아! 맞다. 그때 기억난다. 같이 막 울었던 기억이 나네."


사실 난 민지처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때 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워낙 그런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지에게 있어서는 '왕따'는 인생의 큰 사건이었고, 그날의 상담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민지는 상담을 기점으로 왕따의 후유증을 빠르게 극복해나갔고, 지금은 학교 내의 핵인싸다.


"선생님, 제가 지금 저희 반의 분위기 메이컨데요. 요새 고민이 하나 있어요. 항상 애들을 웃기고, 반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요. 애들도 저한테 그걸 원하는 거 같고... 항상 제가 희생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가끔씩 저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거나 우울할 때가 있는데... 애들이 그걸 몰라줘서 좀 섭섭하기도 해요."


"음... 꼭 반 분위기가 활기차야 할까?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조용한 반 분위기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지 않을까?  반 분위기를 업시킨다는 건 순전히 너의 욕심은 아닐까? 아까 희생이라고 얘기했는데 정말로 희생일까? 선생님이 보기에는 네가 분위기 메이커라는 이미지를 엄청 가지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거든. 너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잖아."


"... 선생님 팩트폭행이네요... (잠시 고민) 음... 쌤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솔직히 를 위한 거 70, 반을 위한 거 30정도?"


"그래. 자신한테 솔직해져야지.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나중에 혹시나 친구들 앞에서 희생을 했다면서 폭발하거나 하면 진짜 큰일 난다? 사실 걔들은 반이 시끄럽든 조용하든 지금 아무 생각도 없을 거야. 네가 갑자기 화내면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걸?"


"아..."


"민지야. 그리고 꼭 인싸가 될 필요 없어. 선생님이 보기에는 네가 혹시나 예전 왕따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두려워서 그런 거 같은데, 괜찮아. 너 지금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멋져. 너 진짜 괜찮은 애라니깐?"


"제가요?(...)"


"그래도 굳이 인싸 이미지를 선택하겠다면, 네가 선택한 것이니 지금의 스트레스는 스스로 감당해야지. 친구들한테 섭섭해하지 말고."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거 같아요.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된 거 같아요."


제자가 또 혹시나 자기비하하고 자존감이 낮던 예전 상태로 돌아갈까 봐 걱정되어 노파심에 많은 조언과 잔소리를 했다. 나도 이전에 그런 과정을 겪은 적이 있기에 민지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했고, 좀 더 디테일하게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민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학교를 떠났다.




그저께 5학년 체육시간이었다. 유독 얼굴 표정이 어두운 학생이 눈에 계속 띄었다. 내가 운영하는 방송부의 학생이기도 한 세진(가명)이었다. 세진이는 작년까지만 했어도, 딱 봐도 발랄하고 활기찬 학생이었다. 특유의 긍정적 에너지와 자신감 덕분에 작년에 방송부에도 뽑혔었다. 하지만 5학년 들어서 본 세진이의 모습은 자존감이 확 떨어진 상태였다. 뭘 해도 자신이 없어 보였고, 체육활동에도 소극적이었다.


언젠가 한 번 세진이랑 따로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전담이라 워낙 가르치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항상 후순위에 밀려있었다. 사실 세진이를 이 상태로 가만히 놔둬도 딱히 큰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얼마 전에 찾아온 민지를 생각하며, 나의 작은 관심이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업이 끝나고 세진이를 따로 불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는 세진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물었다.

"세진아, 요새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니? 너 원래 안 그랬잖아. 엄청 활발하고 자신감도 넘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세진이가 울었다. 그것도 펑펑. 그동안 터질 듯, 말듯 했는데 내가 정곡을 찔렀나 보다. 세진이가 좀 진정이 된 후에 질문을 바로 이어갔다.


"세진아, 왜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을까?"


"제가 2학기 때부터 댄스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한 번도 칭찬을 못 받아봤어요. 거기 애들도 전부다 저보다 춤도 잘 추고 예쁘고... 칭찬받고 싶어서 진짜 노력 많이 했는데, 아무도 저보고 잘한다고 말을 안 해줘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계속 줄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 학교에서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아... 그랬구나. 세진이 너 춤 엄청 잘 추는데~ 방송부도 쌤이 너 춤 잘 춰서 뽑았는데 ㅎㅎ 당연히 댄스학원에 가면 잘하는 친구들이 많지. 거긴 잘하는 친구들만 모이는 곳이니깐. 선생님한테 칭찬도 못 받을 수도 있지. 하지만 칭찬 때문에 춤을 추는 건 아니지 않나? 네가 좋아서 춤추는 거잖아. 그리고 댄스 학원에서는 네가 춤을 못 추는 편이지만, 반에 가면 네가 제일 춤 잘 추잖아. 아니야?"


"맞아요."


"그래. 계속 남이랑 비교하다 보면, 정말 끝도 없다니깐. 대신에 매일 너 자신을 칭찬해주는 건 어때? 넌 충분히 춤도 잘 추고 그리고 노력도 많이 하잖아. 아, 그리고 쌤이 봤을 때는 2학기 때부터가 아니라 1학기 때도 좀 힘들어 보이던데 그건 왜 그런 거야?"


갑자기 또 펑펑 우는 세진이

"아니, 그게... (눈물) 뭘 해도 다 잘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 생각이 계속 들면서, 자신감이 사라져요.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생각하게 돼요...(눈물)"


"흠... 쌤도 그 기분을 잘 알지... 아, 그래서 네가 그동안 힘들어 보였던 거구나..."


"네..."


"세진아."


"네?"


"넌 충분히 괜찮은 아이야."


"..."


"넌 정말 괜찮은 아이야.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야."


(다시 우는 세진이)


"춤도 잘 추고, 공부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방송부 일도 열심히 하고 그 누구보다 모든 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얼마나 멋지니? 선생님은 네가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해. 진짜 진심이야. 선생님은 세진이 네가 네 자신을 좀 더 칭찬해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요새 네가 계속 싫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네... 제 자신이 싫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건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조금씩 네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거야. 작은 성공에도 너 자신을 칭찬해봐. 그리고 매일 거울을 보면서 너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라고 말을 해봐. 세진아, 정말 넌 진짜 괜찮은 애라니깐."


"..."


"선생님 내년이면 이 학교 떠나는 거 알고 있지? 학교 떠나기 전에, 선생님이 정말 진심을 담아서 마지막으로 네게 조언해주는 거야. 선생님은 네가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한참 말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세진이의 감정에 동화되어서 눈물이 나왔던 걸까? 아니면 정든 학생들과 학교를 이제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눈물이 나온 걸까?


"아... 왜 이러지... 세진아, 잠깐만..."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자, 세진아 이것만 기억해둬.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야. 충분히 멋진 아이야. 선생님이 인정하는 학생이니깐 충분히 자부심 가져도 돼. 앞으로는 너 자신을 좀 더 사랑해봐. 알겠지?"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떠나는 세진이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날 나는 세진이에게 작은 성장의 씨앗을 심었다. 3년 전, 왕따를 극복하고 인싸가 된 민지처럼 언젠가 세진이도 지금의 상태를 극복하고 싹을 틔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의 작은 조언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기를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우는선생 #학생상담 #성장 

매거진의 이전글 체육전담교사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