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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분장은 괴로워.

by 교실남
"다른 선생님은 안 바빠 보이는데, 왜 항상 선생님만 바빠요?"


오늘도 어김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점심시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신없이 일하는 나에게 우리 반의 성윤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러게, 성윤아. 선생님은 왜 항상 바쁜 것일까.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심지어 주말에 열심히 일을 해도 내 업무는 끝이 없었다. 마치 눈앞에 필수 퀘스트들이 무한으로 배치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아직 일에 능숙하지 못해서 지금 내가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당시 나의 업무는 다음과 같았다.

전교 어린이회 및 임원수련회, 체육대회, 생존수영, 창의적 체험활동, 합창부, 문예대회, 영상대회, 컵스카우트, 현장체험학습, 학예회, 소프트웨어 교육, 진로주간 운영


아마 일을 어느 정도 해 본 연차가 있는 교사라면, 이 업무분장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알 것이다. 작은 학교라는 것을 감안해도, 현장체험학습, 체육대회, 학예회 등 학교의 중요한 행사란 행사는 다 때려 박은 이 업무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 게다가 전교 어린이회 담당이라는 이유로 새롭게 생긴 학생 관련 행사들은 대부분 자동으로 내 담당이 되었다. 동료 선생님들은 거의 격주 단위로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는 나를 보며 행사의 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지만, 난 그 별명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군말 없이 내 일에 최선을 다했다. 불평 없이 내 일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내 업무로 정해졌기에 바꿀 수 없는 올해 업무 분장에 집중하기보다는 주어진 여러 일들을 하면서 내 업무 역량을 늘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면 나중에 업무분장을 할 때 그만큼 나의 발언권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선생님들이 이 업무가 정말 말도 안 되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고, 내년도 공정한 업무 분장 수정에 힘을 보태주기를 바랐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재외 한국학교 신규 선생님 중 누군가에게 일을 몰빵 하는 이런 시스템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마다 업무를 균등하게 배정하고 싶었다. 설사 내년에 누군가 내 업무를 다른 수월한 업무로 바꿔준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업무분장을 할 때 나의 발언권이 커질 거라는 내 생각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했다. 업무 분장 시즌이 되자,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업무 분장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고통은 상대적이다.


첫 번째는 현재 업무분장도 충분히 공평하다는 반응이었다. 주로 다양한 업무 경험이 많이 없는 나와 비슷한 저연차 선생님들의 반응이 이랬다.

"저는 교실남 선생님의 업무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음... 선생님, 혹시 제 업무 중에 이전 학교에서 해보신 거 있을까요?"

"없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전부 힘들어요. 교실남 선생님만 힘든 게 아니라고요."


졸지에 모두가 힘든데 혼자만 징징 거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 선생님들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재외 한국학교에 오기 전에는 큰 학교에서 작은 업무(심지어 어떤 선생님은 몇 년 동안 학운위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일만 했다고 한다.)만 하다가, 여기 와서 기존에 하던 것보다 2~3배 정도의 업무를 맡으니 힘들 수밖에. 하지만 이 분들의 업무들까지 대부분 경험해 본 내가 봤을 때, 현재 나의 업무량은 적어도 이 선생님들 업무량의 2~3배는 되었다.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분들은 현재 하고 있는 업무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업무의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이미 본인들은 힘들 대로 힘드니 다른 업무들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업무가 힘드니, 저 업무가 힘드니 따지고 설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태세전환 혹은 무관심


'그래, 저연차 선생님들은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고연차 선생님들은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 봤으니깐 내 말에 공감하고 이해해 주시겠지?'


특히나 난 현재 내 업무의 전임자였던 A 선생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학기 초부터 나에게 와서 이 업무 힘들지 않냐며, 당신 또한 작년에 혼자 일하는 기분이었다면서 위로와 공감을 해줬기 때문이다. A 선생님은 본인 또한 작년에 업무 분장을 바꿔보려 시도했지만, 사람들이 논의를 하려 하지 않아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얘기를 듣고 담당 부장님이 A 선생님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작년에 업무분장 관련해서 의견 내라고 했을 때, 어차피 내년에는 내 업무 아니니깐 그대로 가도 상관이 없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A 선생님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내가 업무를 해보니깐 말이야. 예를 들어 어떤 업무는 B라는 사람에게는 엄청 쉬운데, C라는 사람에게는 엄청 힘들 수 있더라고. 그렇게 보면 C라는 사람에게 지금 내 나이스 업무는 아주 힘들다고 볼 수 있지. 이게 잘 알지 못하면 진짜 힘든 거거든. 봐봐. 사람마다 그 업무에 대해 느끼는 정도가 다른데, 과연 업무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 그냥 이전 그대로 가는 게 맞다고 봐.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도 업무분장 바꾸는 건 딱히 원하지 않던데?"


불과 몇 달 전까지 현재의 업무 분장은 불균형하고 언젠가 바꿔야 하며, 본인의 나이스 업무가 꿀이니 나중에 나이스 업무를 추천한다고 했던 A 선생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그것도 사람들마다 느낄 수 있는 게 다르다는 괴상한 논리를 펴면서. 기가 찼다. 그제야 예전에 담당부장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임을 알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내년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입장이기에, 더 이상 자기 일이 아니니깐 굳이 업무분장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년에 한국으로 귀임하는 다른 선생님들 또한 A 선생님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번복 그리고 번복


세 번째는 오락가락하는 반응이었다.

불과 몇 달 전, 교무부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교실남 선생님, 고생이 많지? 너무 업무가 몰려 있어 힘들겠어. 나중에 업무 분장 손 한 번 보기는 해야 할 거 같아."


하지만 업무분장 시즌이 되자 말이 다시 바뀌었다.

"교실남 선생님,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그래서 난 우리 반 애들한테는 공평보다는 이해와 배려를 가르쳐. 공평을 계속 외치면 억울한 마음에 낙오자나 사회부적응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공평함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하려고 노력해. 그리고 솔직히 교실남 선생님 업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야. 업무를 쓸데없이 힘들게 벌려서 많아진 거지. 학예회만 해도 봐봐. 나 같으면 그냥 전교생 운동장에 불러서 간단하게 1명씩 장기자랑 하고 끝낼 건데, 쓸데없이 슈퍼스타D니 뭐니 하면서. 선생님이 일을 만들어서 그런 거지, 업무 자체는 다른 선생님들이랑 비슷하다고 봐."


이랬던 교무부장의 말은 업무분장이 내 뜻대로 진행이 되려고 하자 또 바뀌었다.

"교실남 선생님, 그냥 우리 좀 편하게 가면 안 돼? 1년 동안 우리 함께 고생했잖아. 우리는 좀 쉬고, 새로 오는 선생님들은 우리가 했던 일하고, 얼마나 좋아.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돼?"


"..."




자기 의심에서 빠져나오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업무분장을 바꾸는 거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더 이상 업무분장을 새로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현재 업무분장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걸 문제 삼는 네가 잘못됐다는 선생님들의 반응을 여러 번 겪으니,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교무부장 말대로 사회부적응자가 된 기분이었다. 작은 의심은 점점 커져서, 사실 내 업무는 별 거 아니었고, 나 혼자 과대평가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교실남 선생님, 업무분장표 보세요. 이게 말이 돼요?
이거 무조건 바꿔야 해요."


한창 자기 의심의 늪에 빠져있던 나를 교장 선생님께서 구해주셨다. 교장 선생님은 논리적으로 업무분장표 전체를 분석하며 말씀하셨다.

학적관리(나이스, 시간표, 제장부관리, 학교일지), 전편입관련업무, 교과서 신청 및 배부, 교내 행사 지원, 교수학습 자료개발, 성고충위원회 남교사상담위원, 학생생활기록부 관리, 학교장 경영평가서 결과 분석, 위원회 활동(학업성적관리위원회 간사), 학교 홍보

"교실남 선생님, 여기 A 선생님 업무분장 보세요. 교내 행사 지원, 교수학습 자료개발, 시간표 이거는 어느 선생님이나 다 하고 있는 거잖아요? 본인이 따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왜 이게 업무분장표에 들어있는 거죠? 그냥 빈칸 채우기로 있는 거 같은데. 학교장 경영평가서 결과 분석이랑 교과서 신청은 사실 1~2시간이면 일회성으로 끝나는 업무고. 성고충위원회 상담위원은 업무라고 볼 수 있나요? 대부분 이름만 올라가는 건데? 학업성적관리위원회도 1년에 1~2번 해봤자 1~20분 열리는데 이걸 굳이 업무분장에 넣을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학교 홍보는 A 선생님이 한 걸 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재외는 나이스 사용을 많이 안 해서 나이스가 그렇게 안 힘들잖아요? 과연 이 업무들이 일대일로 매칭했을 때 체육대회, 컵스카우트, 학예회 같은 업무랑 업무 강도가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분장표 보니깐 글자수만 많고, 실질적으로 일하는 건 별로 없는 거 같은데요?"


내가 다른 선생님들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더 미움받을까 두려워 말하지 못한 것을 교장 선생님께서 시원하게 말해주시니 속이 다 시원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나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교실남 선생님, 내년에 부장 하시니깐 교무부장님이랑 두 분이서 업무분장 잘 의논해 봐요."


확신을 얻고 좀 더 과감하게 업무분장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한국으로 귀임하는 선생님들은 업무분장이 바뀌는 것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나는 크게 4가지 기준으로 업무분장을 바꿨다.


첫 번째, 교장 선생님이 지적하신 눈속임을 위한 채우기식 업무를 업무분장표에서 다 뺐다. 업무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글자 숫자만 보고 일이 많다고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존의 내 업무를 3~4등분으로 쪼개서 분산시켰다. 업무 분장을 짜면서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원래 많았다고 생각했던 내 업무는 더 많았다... 한 사람에게 몰리는 것을 막고자 현장체험학습, 학예회, 체육대회 등 학교의 메인 업무들을 한 사람이 1개씩 담당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 부장인 내가 계원보다 업무를 더 많이 들고 가기로 했다. 업무분장을 하며 깜짝 놀란 점은 그동안 내 담당부장님의 업무량은 내 업무량의 절반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1년 동안 기안을 100개 올렸을 때, 부장님은 달랑 4개 기안을 올린 걸 보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왜 그동안 부장님이 나에게 은근슬쩍 부장이 더 쉽다고 부장을 권유했는지 이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근데 이게 맞나? 부장은 월급도 더 받는데? 이런 업무분장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부장이 업무를 더 많이 하고 계원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여야 그만큼 계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기존 부장의 업무에서 여러 업무들을 추가하기로 했다. 네 번째, 부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계원들은 업무를 균등하게 배치했다. 고통은 상대적이라느니, 업무의 상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새로 오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고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공정한 업무분장은 균등하게 업무를 배치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규 선생님들의 명단이 확정된 이후에는 최대한 그 선생님의 특기와 선호에 부합하는 업무와 학년을 배정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선생님들이 합리적으로 업무 배정을 받아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하길 바랐다.



나에게 솔선수범하라며 한 소리했던 교무부장은 교무부장직을 내려놓고 일반 계원으로 돌아갔다. 당신이 말한 대로 솔선수범을 하려나 살짝 기대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모습은 없었다.

"교실남 선생님, 그냥 우리 편하게 가자. 교실남 선생님도 그렇게 업무 많이 들고 갈 필요 있어? 부장이 얼마나 힘들다고. 나는 나이스 업무로 할게."


얼마 뒤, 꿀이라 생각해 선택했던 나이스 업무에 국제교류 업무가 더해지자(사실 그건 교장 선생님이 추가한 거였다.) 전(前) 교무부장은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뭐, 그분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1달 뒤, 신규 선생님들이 중국에 입국했다.

"부장님, 어떻게 업무가 그렇게 균등한 지 딱 이거다 하고 선택하고 싶은 업무가 하나도 없었어요."


신규 선생님들은 너무나 업무 분장이 고르게 되어있어 선택할 게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본인의 업무에 불합리함을 느끼진 않는 거 같아 다행이었다.


몇 달 뒤, 신규 선생님들이 하는 얘기를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다.

"우리 학교는 업무가 적은 게 장점인 거 같아요."


업무가 적다고 말하는 신규 선생님의 말에 공감하는 다른 신규 선생님들을 보며, 작년에 일하며 고생했던 것과 일을 많이 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한 것, 업무분장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힘들었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며 감회가 새로워짐을 느꼈다.


'아... 이젠 정말로 내가 원했던 학교의 모습이 되었구나.'


정말 괴로운 업무분장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자부심과 뿌듯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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