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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 선물 같이 내린 함박눈

by 교실남

"여기는 위도가 꽤 높아서 눈 자주 오지 않아?"


"선생님, 말도 마세요. 이상하게 여긴 춥기만 하고 눈은 안 와요. 엄마한테 들었는데, 제가 2살 때인가 그때 눈 한 번 크게 왔었대요. 그 뒤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눈이 내린 적이 없어요."


1학기 초, 사회 시간에 위도와 경도를 배우며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였다. 사실 중국에서도 꽤 위도가 높은 지역에 있는 이 학교에 지원할 때,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는 상상도 했었다. 그래, 상상은 상상일 뿐. 아이들의 말을 듣고 눈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접기로 했다.


벌써 12월이 되었다. 길고 힘들어 보였던 중국 생활 첫 해도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올해는 날씨가 꽤 쌀쌀했다.

"얘들아, 이 정도 날씨면 눈 올 거 같지 않아?"


"에이, 설마요. 여태 안 왔는데 오겠어요?"


우리는 평소대로 별생각 없이 수업을 이어갔다. 쉬는 시간도 없이 얼마나 수업에 열중을 했던지 두어 시간 동안 밖의 상황을 전혀 살피지 못했다. 심지어 교실에는 커튼도 친 상태였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온 아이들이 말했다.

"왁!!!!! 선생님 대박이에요! 밖에 보세요. 미쳤어요! 이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헉!!! 뭐야? 함박눈이잖아? 분명 아까는 눈이 없었는데? 두 시간 만에 이렇게 눈이 쌓일 수 있는 거였어?"


"선생님, 진짜 대박이에요! 우리 나가서 눈싸움해요!"


시간을 보니 2시 반이 조금 넘었다. 3시 10분 하교니깐 지금 나가서 놀면 시간이 충분할 거 같았다. 때마침 아이들 방과 후 수업도 없어서, 나가서 놀기 딱 좋았다. 게다가 10년 만에 내린 눈이라니! 이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나 또한 태어나서 처음 봤다. 아이들과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 같았다.


"좋아. 전부다 밖으로 돌격!!!"


"우와와와와!!!"


우리는 잔뜩 설레는 마음과 함께 운동장으로 신나게 뛰어나갔다.

KakaoTalk_20250523_144459239_02.jpg 눈을 만끽하는 아이들


학교 운동장은 함박눈으로 뒤덮여 온통 새하얬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이었다. 더군다나 나오기 애매한 마지막 교시여서 그런지, 초중고 포함해서 아무도 운동장에 없었다. 이 학교에 지원하기 전 상상했던 그림들이 이제 막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우리 세상이다. 마음껏 놀자!!!"


마치 꿈속에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사가 있는 겨울왕국에 우리 반만 초대받아서 노는 느낌이랄까? 아이들 또한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지금 진짜 꿈같아요. 와..."


"얘들아, 일단 우리 기념사진 촬영부터 하는 게 어때?"


하나, 둘, 셋!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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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 나오자마자 아이들과 찍은 기념 사진


이제 본격적으로 놀 시간이 되었다.

"얘들아, 우리 팀 나눠서 눈싸움 한 판 어때?"


"좋아요!"


팀전, 개인전으로 정신없이 눈싸움을 했다. 근데 아이들이 왜 나를 더 공격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아이들에게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얘들아, 이번엔 가위바위보 해서 한 명이 지면 30초 동안 그 사람만 공격하는 건 어때?"


"오, 좋아요."


"가위바위보!"


"우와!!! 선생님이 졌다."


11명의 아이들이 눈덩이를 집어 들고 추노꾼처럼 나를 쫓아왔다.

"(숨을 헐떡이며) 헉헉... 얘들아, 선생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원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죠. (웃음)"


덕분에 온몸이 다 젖었지만, 온갖 족쇄에서 풀린 해방감이 들었다.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몇 번 더 가위바위보를 했다. 지윤이는 자처해서 눈무덤을 만들어주기를 원했고, 채이는 아이들에게 눈샤워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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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이의 눈무덤(좌), 채이의 눈샤워(우)


"와... 선생님,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오늘이 올해 중에 제일 행복해요. 조금만 더 놀다 가요. 딱 5분만 더!"


하교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우리는 계속 눈싸움을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꿈과 같은 시간을 계속 만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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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정리하고 교실에 올라오니, 아이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자진해서 눈무덤을 원한 지윤이와 눈샤워를 당한 채이의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혹여나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감기 걸리면 어때요? 오늘 같은 날이 정말 흔치가 않은데. 저희 부모님도 다 이해해 주실 거예요."


아이들이 걱정 말라고 했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아이들과 다른 경우를 한국에서 많이 봐왔기에 살짝 걱정된 마음으로 학부모님들께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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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답장이 왔다.


역시나 우리 반 학부모님은 내 교육적 의도를 정확히 이해를 하고 계셨다. 학부모님들께 감사한 문자들을 받고 눈놀이로 즐거웠던 나의 기분은 더 업되었다. 이러니 내가 더 열심히 아이들 교육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그때는 정말 꿈만 같았어요."


그 후로 1년이 지나도 아이들이 꿈만 같았고, 최고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때의 기억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눈으로 덮인 새하얀 운동장과 티 없이 해맑게 웃는 아이들. 그리고 항상 응원하는 학부모님. 그날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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