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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갓 Apr 06. 2020

피아노 치는 소녀

1화

 나는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할 일이 생길 때, 그러니까 기차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때, 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꽤 긴 시간 동안 그래 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일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오늘은 갑자기 급한 출장이 잡혀 버리는 바람에 항공기 예약은 하지 못하고, 기차를 타게 되었다. 출발 시간이 되어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내가 그 소녀를 처음 본 건 작년 여름, 무더위가 끝나고, 그 끝을 알리듯 장대비가 쏟아지던 오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의미 없는 시간들을 흘려보내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 사실 집 근처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큰 특징 없는 동네 카페다.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고, 한쪽 벽면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큰 책꽂이가 있다.

 나는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창가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비 내리는 풍경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일등석이다. 책가방에서 읽을 책을 꺼내려고 몸을 살짝 돌리는 순간 내 시야에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자기 얼굴만 한 컵을 앞에 두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보통의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컵이 하나다. 아이가 혼자 여기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엄마는 어디 가셨니?”

 아이는 천천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고, 나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흥미를 잃은 듯, 이번에는 몸을 틀어 책장 반대쪽 벽면에 있는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말없이 피아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꺼내려던 책을 꺼내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잠시 후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다시 아이 쪽으로 돌아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피아노 치고 싶니?” 아이는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는 카운터로 가서 피아노를 쳐도 되냐고 물었고, 여사장님은 살짝 웃으며 상관없다고 답했다. 나는 아이에게 가서 사장님에게 허락받았으니 피아노를 쳐도 된다고 말했다. 아이는 잠깐 동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망설임 없이 곧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뭐랄까, 피아노를 잘 모르지만, 결코 쉬운 난이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곡이었다.

 연주는 금방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렇게 10분여의 시간이 흐른 후에 긴 연주가 끝났다. 연주를 마치고, 아이는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도 생각이란 걸 하려던 찰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카페 구석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아르바이트생이 아이가 있던 자리의 컵을 치우고 있었다.

 “혹시, 아이는 어디 갔나요?”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아, 어머님께서 오셔서 데리고 가셨어요.” 아르바이트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빈 컵을 들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금세 미지근해져 버렸다. 나는 컵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혹시 커피를 다시 데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여사장님은 이번에도 웃으며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데우면서 여사장님이 말했다.

 “멋진 연주였죠?”

 “네, 그러네요.” 나는 내 마음이라도 들킨 듯, 어벙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혹시, 연주했던 곡, 어떤 곡인지 아시나요?” 여사장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그 답은 아르바이트생이 대신했다.

 “쇼팽 발라드 1번” 아르바이트생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다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를 나에게 내어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답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오는 아이예요. 매번 저렇게 엄마가 아이를 두고 어디 갔다가 다시 데리고 가요. 그래도 피아노 치는 건 오늘 처음 보네요.” 여사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컵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컵이 너무 뜨거워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나는 커피가 조금 식을 동안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쇼팽 발라드 1번을 들었다.

 내가 그 소녀를 다시 만난 건 그 후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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