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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갓 Apr 08. 2020

피아노 치는 소녀

2화


 집(그리 넓지는 않지만) 안은 고요했고, 창문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리는 새벽이었다. 나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따금씩 들리는 빗방울 소리는 내 마음을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인가 저 멀리서부터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소리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할 만큼 희미했다가, 점차 선명해졌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낯선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눈을 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있었다. 내 주위로는 소나무 방풍림 숲이 뻗어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적당한 햇살과 가끔씩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은 내 마음을 간지럽혀주었다.

 그리고 백사장 끝, 그러니까 바닷가 근처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폈다. 여자 같았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내 기억을 빠르게 뒤져 보았지만, 비슷한 사람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조금씩 그 여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사박사박, 하는 모래 밟는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났다.

 서서히 그 여자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녀는 보통의 여자들과 비슷한 체형에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내 또래처럼 보였다. 그녀가 입은 얇은 하얀색 원피스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살랑거려서 광고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의 그림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얼굴을 완전히 돌려 우리가 마주 본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잠에서 깼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가만히 누워서 집 안에 가득 차있는 고요함과 빗소리를 한참이나 듣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도 신비한 경험에 정신이 말짱해졌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소나무 방풍림, 파도 소리, 바닷바람의 촉감, 그 여자까지, 모든 것들이 생생했다. 단지, 꿈으로 느껴지는 생생함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만큼.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쉰다. 적당히 머리를 써야 하고, 적당히 몸도 써야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받는 급여도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다(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아무튼 평일에는 퇴근이 조금 늦는 편이라 카페에는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는 카페에서 봤던 아이도 자연스럽게 잊게 되었다.

 나는 주말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집 근처 카페에 간다. 맞다, 그 카페다. 주말에는 일찍 집을 나서야 내가 원하는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하긴, 주말 오전부터 카페에 나와 시간을 축내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겠지.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창가 앞에 앉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챙겨 온 책을 꺼냈다. 오늘따라 왠지 책이 잘 읽히는 것 같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날이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책 읽기에 너무 열중한 탓인지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다. 제자리에 앉아 잠깐 스트레칭을 하는데 내 왼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정말 놀라서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아이는 미동도 없어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아이에게 말했다.

 “어, 오랜만이네?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야?”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건 또 나였다. 대답을 듣기는 힘들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답을 찾기로 했다. 아이의 핫초코 잔은 아직 가득 차 있고, 컵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방금 왔나 보네? 오늘도 혼자 온 거야?” 나는 또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피아노 칠래?”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카운터 쪽으로 몸을 틀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사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사장님의 눈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내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아이는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여러모로 놀라움을 많이 주는 아이다. 아이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아이는 혼자서, 한참이나 피아노를 쳤다. 나는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그 곡이 어떤 곡인지는 몰랐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곡이 클래식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그저 연주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그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반보다 작은 손을 이용해 아름다운 선율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얼굴. 마냥 천진난만해야 할 나이에 그 아이는 왜 그런 표정을 갖게 된 것일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내 가슴이 서서히 먹먹해지더니 이내 통증으로까지 이어졌다.

 “으윽..”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에 먹구름이 가득 찬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러자 가슴과 머릿속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창가 자리에 놓여있던 핫초코는 식어 있었고,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카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소중한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를 보는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왠지 모를 허전함과 아쉬움이 느껴졌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혼이 빠진듯한 멍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식어버린 커피가 길을 잃은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데리고 왔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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