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주인이던가?
<껍데기>
내가씌운
남이씌운
허울벗은
그곳에서
나는
나였던가
지난주 순천에서 짬뽕가게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다녀왔다. 일교차가 극심한 이맘때면 마음도 그와 같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휴가를 냈는데, 일찍이 친구 매장을 방문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기에 그곳으로 다녀온 것이다. 서울에서 4시간 거리, 나를 아는 단 한 명, 그 한 명 조차도 주방장이라 주방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 나는 그런 곳에서 홀 서빙을 해보고 싶었다.
학부시절, 이제는 10년이나 지나버린 그때, 동아리 선후배들과 주말마다 출장뷔페 아르바이트를 했다. 손님은 천주교에서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하객이다. 출장뷔페는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중노동 수준의 일인데, 토요일은 출장뷔페 일요일은 웨딩홀 서빙을 했던 내가 업무 강도를 표현하자면 웨딩홀의 3배 혹은 5배 정도라 하겠다. 그런데도 웨딩홀보다 힘들지 않았다. 이유는 우리에게 힘듦을 재미와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정도의 또라이 능력이 다분했기에다. 이유를 막론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을 또라이라 표현한다면, 우리 집단이 바로 그 또라이었다. 인내가 부족한, 인내를 배워나갈 시기에 힘든 일들을 재미로 이겨낸 그 시절, 우리는 쉽게 얻지 못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작년이었다. 다시금 나는 그 또라이적 재미를 느끼고 싶어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난 동아리 사람들에게 시간 날 때 아르바이트를 해보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나는 무엇을 깨닫고 싶음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조건 없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했다. "제가 어떻게 그걸 다시...", "못할 것 같아요...", "내가 이 나이 먹고 그걸 어떻게 다시 하냐" 등 충분히 예측 가능한 답변이었으나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솔직히 나도 다시 하기 힘들다. 수술한 무릎이 12시간 고된 일을 버티기 어려우니 말이다. 내 기분이 흐려진 것은 일을 하고 못하고의 문제보단 세상의 허울에 갇힌 답변 때문이었다.
나에게 돌아온 답변을 관찰해 보면 다시금 그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부, 명성, 나이와 같은 자신의 위치를 대변할 껍데기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몸이 힘든 것을 떠나 그 일을 하는 도중 자신의 껍데기가 벗겨질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껍데기 없이 자신은 자신으로써 존재할 수 없음이 두려운 것이다. 단지 그 시절의 즐거움을 되돌아보려던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다. 나도 그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아닌가 라며, 그래서 투자했다 나의 여가를.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해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기를 어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기 싫어 어떤 일을 할 땐 항상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는 편이다. 그런데 홀 서빙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온순한 양처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출장뷔페 경력도 있으나 묻기 전에 말하지 않았다. 온순한 양처럼, 세상모르는 신생아처럼 따랐고, 과거 식당을 방문하며 기분 좋았던 서비스를 행했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네, 얼마입니다... 친절히, 크게, 빠르게.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청년처럼, 월급 많이 받는 직원처럼, 주인인 것처럼.
친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떠리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네", "도와줘서 고마워" 등의 말을 들었지만 완벽히 하나의 일원으로써 그런 이야기를 한건 아닐 테다. 한 번 도와주는 사람으로의 답변일 테다.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사람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열심히 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나도 고작 하루였기에 노력할 수 있었지 본업이었다면 그리 즐겁게만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완벽히 내 허울을 벗고 다른 것을 했다. 그런 기회가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도 않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 곳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를 뚜렷이 그려내기 시작했다.
서빙을 하며, 어떤 방법이 더 효율적인가? 어떤 목소리가 더 효과적인가? 이것을 저리 하면 어떤가? 저것을 이리하면 어떤가? 내 머릿속은 끊임없는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그렇게 된 것, 이미 정형화된 것은 나에게 관심 밖인 것이다. 친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나를 몰랐기에 "쟤는 뭐하는 애지?", "저 나이에 왜 여기 있지?", 손님들은 "사장인가?", "뭐 하다 저걸 하는 걸까?" 라며 생각했을 수 있다. 그것 마저도 지금에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민하며 적어보는 것이지 당시에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당시엔 그저 어떤 것이 장사를 더 이로운 방향으로 바꿔줄 수 있을까만 고민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과거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깊숙이 관찰했다. 내가 무엇으로 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껍데기를 벗은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했다. 내가 씌운, 남이 씌운 모든 허울을 벗어내도 나는 나로서 존재했다. 사람들은 내게 껍데기를 씌우겠지만 가진 것, 이룬 것으로 위엄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소중하다. 위대한 작가들을 선망하나 그들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지금의 글도 서툴고 어색하나 6개월 전 형편없는 글과 비교하며 만족한다. 남의 길이 아닌 내 길을 되돌아보며 기뻐한다. 남의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지식 안으로 가두는 것을 즐거워한다. 어렵지만 독창적이길 노력한다. 그것이 허울 벗은 나로서의 나였다.
나는 도전으로 나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지휘에 굳어있고, 명예에 닫혀있는, 지식에 의존하고, 틀에 갇혀있는 나는 내가 아니다. 그것으로 나는 나의 주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며, 충분히 스스로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알고자 하는 이런 문화조차 다른 나라를 답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피할 순 없잖은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것을 앎으로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이지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다. 나는 돈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니 돈 좋아하는 속물로 평가하지 말라는 행위다 다름없다. 알면 좋은 것 아닌가? 돈 많으면 좋은 것 아닌가? 외국의 지식을 수입하는 것, 생각하는 방법까지도 수입하는 것, 자본주의 구조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 심지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진부한 질문까지도 따라 하는 것. 따라 하는 것은 허름하지 않다. 남의 지식을 내 것인 마냥 행세하는 일이 구차한 일이고, 돈에 지배당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굳건하다면 남이 만든 지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으며, 돈을 낭비하지 않고 운용할 힘을 갖출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