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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Aug 05. 2018

진급

#036_불안

<1>

모두에게 인정받았지만 거침없는 언행으로 매번 진급에서 누락되어왔다. 3번째 누락 대상자에 올랐을 땐 위안이 마치 조롱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칭찬하는 상관들은 이용하려는 듯 보였고, 주변 동료들은 지금이 최적 상태라는 듯 비꼬는 것 같았다.


4번째, 이번은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해 퇴사 후 이어나갈 사업까지 준비했다. 기대도 없었던지라 이미 아내 이름으로 사업자까지 낸 상황이다. 그리 굳게 마음먹은 것을 알기라도 한 걸까? 작년보다 인사이동 명단이 두 달 일찍 발표됐는데, 게시판에 오른 진급자 명단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사 진급 대상 조원호'


이사? 이사라니, 차장도 아니고 부장도 아니고 이사라니? 3개나 뛰어오르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게다 이사급이면 임원회의를 거쳐 결정될 텐데, 그런 회의가 있었던가?


"이사 진급 대상 조원호님 대회의실로 10시까지 오시기 바랍니다."


원래도 큰 눈이지만 두 배나 커진 눈 앞으로 익숙한 동료들이 축하 메시지를 던진다. 고맙다며 인사해야 하겠으나 그럴 정신이 없다.




<2>

정신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많은 동료들이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하고 간다. 입사 3년 차 김수완 대리가 물 한 컵을 책상에 놓으며 대화를 건넨다.


"조 과장님 무슨 낙하산 같은 거 아니시죠? 기쁜 얼굴이 아니라 당황한 표정 지으시는 거 보니 딱 알겠네요. 시원한 물 한잔 하시고, 정신 차리셔야 할 것 같아요. 


정신을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표정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응 고마워, 사람들한테 고맙다고 답변은 하고 있지만 사실 뭐라 답변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러게요. 지금 너무 굳어 계시네요. 올해는 진짜 진급하리라 생각했지만 임원 발탁이라니 누가 상상했겠어요. 아무튼 축하드려요. 지금까지 열심히 배웠는데 임원이면 이제 만나기 어렵겠네요. 그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임원, 그래 이제 임원이다. 이유가 있겠지. 그동안 열심히 하고, 상처도 받았으니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10시에 올라가 보면 알게 되겠지.


"김대리, 이제 김대리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능력 충분히 되잖아. 섭섭해하지 말라고"




<3>

"조원호 과장님. 올해 초 대표님과 부사장님이 교체된 것 알고 계시지요?"


바뀐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진급에 영향이 있으리란 생각은 못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40살인 최성인 이사는 대표가 바뀐 후로도 교체되지 않았다. 전 대표의 낙하산이지만 실력이 좋아 누구나 신뢰했고. 입사 후엔 전 대표와 관계가 나빠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최 이사와는 처음 이야기해 본다. 


"대표님과 부사장님 교체 후 임원의 절반이 보직 해제되거나 또는 퇴사한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따라서 본사는 회사를 이끌 새로운 임원을 선발해야 했고, 대표님은 임원진 절반 교체를 처음부터 생각하고 계셨기에 지난 전 직원 면담에서 후보를 미리 선정해 두셨었습니다. 회사 일정상 이른 인사발령이지만 이미 몇 달 전부터 주시되고 있던 겁니다."


대표이사 교체 후 약 3달간 전 직원 면담이 있었다. 대표이사와 부사장이 직접 일일이 직원들을 면담했는데, 그저 악수만 해도 오래 걸릴 시간에 천 명에 달하는 직원을 만나며 뭔가 꼼꼼히 적더라니. 그게 이거였던 거다.


"아, 네."


"대표님과 부사장님이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임원진은 두 분의 리포팅 결과를 토대로 선발했으니까요."


포장하는 법을 잘 모르는지라 감사하다는 말에 누구 이름을 붙이는 건 잘 못하지만 이번엔 해야 할 것 같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대표가 처음 입을 열었다.


"조원호 이사님, 진급은 확정되었으니 이사님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조 이사님을 추천했던 것은 진실함이었습니다. 대게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을 진실한 것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신이 솔직하다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사실을 더 왜곡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죠. 피해자 마인드를 가슴에 품은 채로 말이에요. 이사님이 했던 말들은 솔직하면서도 진실했어요. 회사에 대해 어떤 왜곡도 없이, 그러니까 올라서려 포장하지도 않고, 피해자인 척하지도 않았어요. 진급에 몇 번이나 누락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될 데로 되라는 식이었는데, 그게 통했을 줄이야.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아, 그랬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4>

정신없는 통에 집에 연락도 못했다. 집에 와서야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오늘 진급자 명단이 나왔는데, 나 진급했데"

아내는 놀라지 않는다. 어차피 사업자까지 낸 마당에 뭐가 놀랄 일인가?


"그래? 그럼 어떡하려고?"


사업에 대해 다소 언쟁이 있었지만, 자존심 강한 분이 오래도 버텼다며 결국 본인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주었다. 


"근데, 나 그냥 진급이 아니라 임원이래, 나 내일부터 이사야"


"응? 뭐? 임원이라고? 뭐야? 왜 갑자기 그렇게나 올라간데?"


"올해 초에 대표가 바뀌었는데 직원들 일일이 면담했었거든, 거기서 내가 잘 보였나 봐"


"아니, 면담 잘 했다고 임원 되는 게 어디 있어? 드라마도 아니고"


자초지종을 더 설명하고 싶어도 이리저리 많이 지친 모양이다. 얼떨떨한 마음에 저녁도 못 먹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고 싶단 생각밖에 없다.


"그러게, 어떻게 그렇게 되니, 난 그냥 좀 일찍 자야 할 것 같아."




<5>
이사로 진급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다. 진급 후 6개월 동안 내부 고발이라도 하듯 케케묵은 찌꺼기를 들어내느라 바빴고, 이제야 잘 굴러가는 시스템에 안착한 느낌이다.


과장일 때 보다 시간적 여유는 늘었지만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 누가 잘못했던 내가 결정한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임원이 되리란 생각을 하지 못한 과장일 땐 그저 그 위치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완벽히 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해야 하는 일들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다르다. 내 실수도 내 탓이고, 부하직원의 실수도 내 탓이다. 회사에서 행해지는 일정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이 됨으로 모든 실패를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무덤덤했지만 작은 실수들이 쌓여갈수록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임원 초기 때만 해도 거침없이 밀어붙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망설여진다. 


"내가 자리에 집착하는 건가?"




<6>

정신없이 현장에서 뛰던 생각이 떠올라 김대리와 술자리를 가졌다.


"김대리 요즘 분위기 어때? 내년 진급 후보지? 능력 좋으니 쉽게 진급할 수 있을 거야"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사에 칼바람 분 후로 분위기는 쭉 좋습니다. 조 이사님이 힘써 주시는데 어떻게 나쁘겠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조 이사님 말투가 많이 순해지신 것 같아요. 전엔 거침없으셨는데, 이제 나이 들어가시나 봐요. 현장에 계실 땐 늙지 않는 분 같더니. 저는 솔직히 그때가 그립네요."


회사에 나오면서부터 대화를 나눴지만 예전보다 말수가 적어진 걸 이제야 눈치챘다. 김수완 대리는 직설적인 나와는 달리 기분 나쁘지 않게 대화를 풀어가는데, 이젠 내가 워낙 높은 직급이다 보니 돌려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다.


"아, 내가 말수가 너무 적었지? 그러네 예전 같지 않네. 요즘 좀 망설이는 게 많아졌나 봐. 하고 싶은 말도 머리에서만 맴도네."


"이사님 예전에 저에게 해주셨던 말 혹시 기억하세요? 지키고 싶은 게 있을 때 망설여지는 거라고. 지금 상황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술기운도 올라오겠다, 저도 예전 최 과장님 시절처럼 거침없이 한마디 드립니다."


"김대리! 역시 내 조수 맞네, 한잔 하자고."


기대가 있었나 보다. 또 다른 기대감이. 그저 할 일만 하면 됐다고 생각했던 예전엔 그 위치, 그 상황에 만족했었는데 말이다. 임원이 아닌 바에야 진급이라는 게 연봉이 조금 오르는 것 말고 큰 변화는 없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대외 관계에도 신경 써야 하고 책임도 크다. 게다 계약직이라 위치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한 번 임원인 후 자리를 유지하기는 쉬우나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언제나 신경 써야 한다.


"이사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생각이 기시네요."


"아니, 내가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나 봐. 고이려는 구만, 김대리 썩기 전에 빨리 마시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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